
사무라이 | 엔도 슈사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에 일어나는 일들
정도성 서사대표

엔도 슈사쿠
요즘 이상하게 엔도 슈사쿠의 책이 자꾸 손에 갑니다.
재미도 있지만, 읽다 보면 나 자신에게 던지게 되는 질문이 참 많습니다.
‘지금의 나는 어떤 믿음으로 살고 있나?’
‘내가 붙잡고 있는 가치들은 여전히 유효한가?’
엔도는 일본 사회에서 소수자였습니다.
기독교인이 거의 없던 시대에, 그는 홀로 믿음을 지키며
끊임없이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던 사람이죠.
그의 작품들은 그런 정체성의 고민에서 출발합니다.
소수자로 산다는 것은 곧,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최근 독서 모임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습니다.
Q) “이 작품은 서로 다른 기질과 환경을 지닌 두 인물(벨라스코와 사무라이)이 각자의 방식으로 변해가는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두 사람의 변화에는 어떤 계기나 전환점이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그 질문을 곱씹으며, 『사무라이』를 다시 읽었습니다. 『사무라이』에는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지방 다이묘의 명을 받아 잃어버린 봉토를 되찾기 위해 서양으로 파견된 사무라이, (배경이 일본의 에도시대입니다) 그리고 그 여정에 동행하는 예수회 선교사 벨라스코 신부입니다. 사무라이는 가문의 명예와 공동체의 의무를 위해 먼 여정을 떠납니다. 다이묘에게 인정받아, 잃어버린 봉토를 되찾는 게 목표입니다. 그의 동기는 철저히 ‘나’보다는 ‘우리’를 위한 것이었죠. 반면, 벨라스코는 종교적인 열심과 개인의 욕심이 뒤섞인 인물입니다. 잠시 중단된 일본 선교를 교황청의 인가 아래 '자신만의 방식'으로 수행하고, 언젠가 일본의 주교가 되기를 꿈꿉니다.
소설 초반, 두 사람은 각자의 욕망을 위해 움직이는 인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날 무렵, 그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사무라이는 처음에는 거짓으로 세례를 받지만, 결국 진심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합니다. 벨라스코 또한 개인적 욕망을 내려놓고, 오직 신앙의 순수한 열정만 남은 채 죽음을 맞이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변화의 ‘계기’가 소설 속에서는 명확히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전환은 어느 날 갑자기, 설명 없이 찾아옵니다. 독자로서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 속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바뀐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대서양을 건너는 일처럼 거대한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는 그 의미를 깨닫기 어렵습니다. 폭풍 속에서는 방향을 잡을 수 없고,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그 시간들이 내 삶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알게 됩니다.
의미는 사건이 끝난 뒤, 조용한 시간 속에서 천천히 생겨날 수 있습니다. 『사무라이』의 두 인물은 아마도 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믿음과 욕망의 경계를 다시 그었을 겁니다.

16-17세기 포르투갈 의상을 입은 일본 기독교인들
사람은 누구나 ‘이야기 편향’이 있습니다. 무의미한 사건 속에서도 의미를 만들어내려는 본능이죠. 하지만 사무라이와 벨라스코의 변화는 단순한 이야기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긴 시간의 침묵과 고독을 통과하며, 충분한 고민과 성찰 끝에 얻은 자기 선택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우리 삶의 변화, 변곡점을 지날 때, 우리는 모를 때도 많습니다. '앗!! 지금이 내 삶의 터닝포인트야!'라고 느끼는 순간도 있지만, 지나고 보니 '터닝포인트였네'라고 생각할 때도 많습니다. 이런 경우는 벨라스코와 사무라이처럼 의미를 만들어낸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전환점은 언제나 극적인 사건으로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조용한 시간’ 속에서 천천히, 스스로 선택되고 발견될 때가 많습니다.
“아, 삶에 의미가 없어.” “일의 의미가 없어.” 그런 헛헛함이 찾아올 때는 변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한 때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잠시 멈춰 서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을 허락해야 합니다. 애쓰지 말고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진짜 중요한 일이 일어나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사무라이 | 엔도 슈사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에 일어나는 일들
정도성 서사대표
엔도 슈사쿠
요즘 이상하게 엔도 슈사쿠의 책이 자꾸 손에 갑니다.
재미도 있지만, 읽다 보면 나 자신에게 던지게 되는 질문이 참 많습니다.
‘지금의 나는 어떤 믿음으로 살고 있나?’
‘내가 붙잡고 있는 가치들은 여전히 유효한가?’
엔도는 일본 사회에서 소수자였습니다.
기독교인이 거의 없던 시대에, 그는 홀로 믿음을 지키며
끊임없이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던 사람이죠.
그의 작품들은 그런 정체성의 고민에서 출발합니다.
소수자로 산다는 것은 곧,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최근 독서 모임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습니다.
그 질문을 곱씹으며, 『사무라이』를 다시 읽었습니다. 『사무라이』에는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지방 다이묘의 명을 받아 잃어버린 봉토를 되찾기 위해 서양으로 파견된 사무라이, (배경이 일본의 에도시대입니다) 그리고 그 여정에 동행하는 예수회 선교사 벨라스코 신부입니다. 사무라이는 가문의 명예와 공동체의 의무를 위해 먼 여정을 떠납니다. 다이묘에게 인정받아, 잃어버린 봉토를 되찾는 게 목표입니다. 그의 동기는 철저히 ‘나’보다는 ‘우리’를 위한 것이었죠. 반면, 벨라스코는 종교적인 열심과 개인의 욕심이 뒤섞인 인물입니다. 잠시 중단된 일본 선교를 교황청의 인가 아래 '자신만의 방식'으로 수행하고, 언젠가 일본의 주교가 되기를 꿈꿉니다.
소설 초반, 두 사람은 각자의 욕망을 위해 움직이는 인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날 무렵, 그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사무라이는 처음에는 거짓으로 세례를 받지만, 결국 진심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합니다. 벨라스코 또한 개인적 욕망을 내려놓고, 오직 신앙의 순수한 열정만 남은 채 죽음을 맞이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변화의 ‘계기’가 소설 속에서는 명확히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전환은 어느 날 갑자기, 설명 없이 찾아옵니다. 독자로서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 속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바뀐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대서양을 건너는 일처럼 거대한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는 그 의미를 깨닫기 어렵습니다. 폭풍 속에서는 방향을 잡을 수 없고,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그 시간들이 내 삶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알게 됩니다.
의미는 사건이 끝난 뒤, 조용한 시간 속에서 천천히 생겨날 수 있습니다. 『사무라이』의 두 인물은 아마도 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믿음과 욕망의 경계를 다시 그었을 겁니다.
16-17세기 포르투갈 의상을 입은 일본 기독교인들
사람은 누구나 ‘이야기 편향’이 있습니다. 무의미한 사건 속에서도 의미를 만들어내려는 본능이죠. 하지만 사무라이와 벨라스코의 변화는 단순한 이야기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긴 시간의 침묵과 고독을 통과하며, 충분한 고민과 성찰 끝에 얻은 자기 선택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우리 삶의 변화, 변곡점을 지날 때, 우리는 모를 때도 많습니다. '앗!! 지금이 내 삶의 터닝포인트야!'라고 느끼는 순간도 있지만, 지나고 보니 '터닝포인트였네'라고 생각할 때도 많습니다. 이런 경우는 벨라스코와 사무라이처럼 의미를 만들어낸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전환점은 언제나 극적인 사건으로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조용한 시간’ 속에서 천천히, 스스로 선택되고 발견될 때가 많습니다.
“아, 삶에 의미가 없어.” “일의 의미가 없어.” 그런 헛헛함이 찾아올 때는 변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한 때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잠시 멈춰 서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을 허락해야 합니다. 애쓰지 말고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진짜 중요한 일이 일어나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