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키의 숨겨진 가치

2024-10-17



나이키의 숨겨진 가치


나이키 창업자가 필 나이트가 공개하는 나이키의 시작. 

일본 저가 러닝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나이키를 창업하기까지 과정을 5분 안에 정리합니다. 



김세리 에디터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 그는 누구? 🤔

필 나이트. 그는 베일에 가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1962년부터 1980년까지 나이키의 초창기 여정을 담은 그의 회고록 <슈독>이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말이다. 이 이야기는 1962년 스탠퍼드대학교 MBA 학위를 가진, 젊고, 반항이라곤 해본 적 없던 한 스물넷 청년으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신발을 파는 일을 왜 좋아하는 것일까? 그 일은 단순히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p.85


일본으로 날아간 육상선수 출신 경영학도 🇯🇵 ✈️

필은 학창 시절 육상선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대학원에서 MBA를 공부했다.  그의 앞날은 창창해 보였다. 하지만 어느 청년이 그렇듯 필에게도 자신을 괴롭히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걸까?’라는 근본적 의문이었다. 돈? 예쁜 여자와 가정? 그의 일부는 이런 것들을 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필의 안에는 분명 다른 형태의 열정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스포츠와 함께 살아가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끊임없는 의문에 휩싸여 있던 그는 마침내 해답을 찾아낸다. 필은 대학원에서 기업가 정신에 관한 세미나를 준비하던 중, 일본 카메라가 세계를 지배한 것처럼 일본의 러닝화가 시장을 장악할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몇 가지 통계와 자료를 통한 추측일 뿐이었지만 그에게는 왠지 모를 확신이 있었다. 



나이키의 시작, 일본의 저가 러닝화 🏃‍♀️👟

그가 눈여겨본 브랜드는 일본의 오니츠카타이거라는 실용적인 운동화 회사였다. 오니츠카타이거와 미팅 자리. 숨을 깊게 들이쉬고 발표를 시작하려 할 때 누군가 물었다. "당신은 어느 회사에서 근무하십니까?" 필은 당황했다. 그에게는 법인도, 직원도 없었다. 그 순간 불현듯 자신의 방 벽을 차지하고 있는, 육상선수 시절 영예의 표시로 받은 블루 리본들이 떠올랐다. "블루 리본입니다. 저는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블루 리본 스포츠를 대표합니다." 


1962년, 그렇게 나이키는 일본 고베의 한 신발 회사와 필 나이트의 머릿속에서 운명적으로 시작되었다. 협상은 성공적이었다. 블루 리본 스포츠를 설립한 필은 품질 좋은 일본의 저가 러닝화를 미국 서부에 독점으로 들여와 판매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집 지하실을 창고로 삼고 트럭을 가게로 삼았다. 초기 자본은 아버지에게서 빌린 1,000달러가 전부였다. 필은 육상 대회가 열리는 경기장을 모조리 찾아다녔다. 코치, 선수, 팬들을 상대로 판매고를 올려 나갔다. 과거 백과사전 영업과 펀드 회사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것과 다르게 신발을 파는 일은 천직처럼 느껴졌다.


"나에게는 달리기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매일 밖에 나가 몇 킬로미터씩 달리면, 세상은 더 좋은 곳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내가 파는 신발이 달리기에 더없이 좋은 신발이라고 믿었다. 사람들은 내 말을 듣고 나의 믿음에 공감했다."

(p.85)


첫해 블루 리본은 매출 8,000달러를 기록할 만큼 성장했다. 문제는 이윤이었다. 마진 250달러는 너무 적은 숫자였다. 은행은 블루 리본이 가진 자본에 비해 성장이 너무 빠르다며 대출을 거부했다. 재무 여건을 고려하지 않은 성장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필은 오히려 오니츠카타이거에 주문량을 두 배로 늘리고, 은행 창구로 가 신용장 발급을 요청했다.


설득과 굽실거림, 협상을 오가며 결국은 대출 승인을 얻어냈다. 신발을 팔아 대출금을 갚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그럼에도 자기자본이 충당되지 않자 CPA 시험을 치고 회계사가 되어 월급으로 받은 돈을 사업 자금에 보탰다. 그의 직업은 얼마간 기업가가 아닌 회계사였지만, 그는 현실과 타협점을 찾으면서 블루 리본을 위기에서 구했다.



오니츠카타이거의 배신과 나이키의 탄생 🪽

사업에 날개가 달렸을 무렵, 필은 당장 일본으로 날아가 열변을 토하며 블루 리본의 성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오니츠카타이거는 더 규모가 크고 탄탄한 판매업자를 원했다. 오니츠카타이거를 안심시키려면 동부 지역에도 사무소가 있어야 했다. "저희 블루 리본도 동부 지역에 사무소가 있습니다." 즉흥적으로 생각해 낸 거짓말이었다.그러나 이번에도 필의 기지가 블루 리본을 살렸다. 


오니츠카타이거는 블루 리본에 미국 전역에 대한 오니츠카타이거 독점 판매권을 부여했다. 5,000켤레의 주문, 2만 달러의 자금, 그리고 신발을 받을,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동부 사무소. 그렇게 블루 리본은 동부 지역에도 뿌리를 내리게 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더 큰 위기가 찾아왔다. 


오니츠카타이거가 블루 리본과의 관계를 끊고, 미국에서 다른 파트너를 찾는다는 소식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에서 건너온 오니츠카타이거 담당자는 블루 리본 인수라는 카드까지 꺼내들었다. 어렵게 일군 기업을 이렇게 팔아넘길 순 없었다. 필은 이제 오니츠카타이거의 품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장을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오니츠카타이거가 아닌 필 나이트,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 차례였다. 



새로운 브랜드의 이름은 승리의 여신 니케를 상징하는 나이키였다. 신발에는 로고 스우시를 새겨 넣었다. 스우시는 누군가 곁을 지나갈 때 나는 소리, 달리기할 때 나는 소리, 바로 나이키의 정신이었다. 


나이키의 정체를 알게 된 오니츠카타이거는 계약 파기와 함께 손해배상 청구를 요청했다. 필은 전 직원 30명을 불러 놓고 이 사실을 말했다. 직원들의 눈에 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무언가가 스쳤다. 포기와 절망의 눈빛이었다. 그때 필이 말했다. "이제는 다른 기업에 휘둘리지 말고 우리 갈 길을 가야 합니다. 오늘 일을 위기가 아니라 해방으로 생각합시다. 오늘을 우리가 독립하는 날로 생각합시다." 법정의 승리는 나이키에게로 돌아갔다. 나이키는 40만 달러의 배상금을 받고 세계 각지에 공장을 하나둘 늘려 갔다.



필은 나이키의 정신을 보여주기 위해선 스포츠 선수가 나이키 신발을 신고, 세계 최고 자리에 우뚝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1976년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선 나이키 신발을 신은 선수들이 나란히 1등과 2등, 3등을 차지했다. 나이키는 올림픽 예선전을 완전히 지배했고, 그날 현장에선 나이키라는 이름이 선수 이름보다 더 많이 들려왔다. 나이키 신발을 신은 일류 선수들은 국경을 넘고, 각종 대회를 넘어 점점 더 많아졌다.



나이키의 브랜드 정신은 어디에서 오는가 🔥

이 회고록에는 나이키의 성공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나이키의 정신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블루 리본의 첫 정규직원이자 열정이 넘치는 필의 동료, 제프 존슨이다. 



따분한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부수입 거리를 찾던 존슨에게 오니츠카타이거는 무척 매력적인 신발이었다. 오니츠카타이거의 영업 판매원이 된 뒤 존슨은 매일 여덟 쪽에 달하는 편지를 필에게 보냈다그날 몇 켤레를 팔았는지, 어떤 선수가 신발을 신었고 그가 몇 등을 했는지를 상세히 적었다. 필의 승인이 떨어지기도 전에 자신 마음대로 잡지 광고를 게재하기도 했다. 


존슨은 그에게만 편지를 보낸 게 아니었다. 고객의 신상 정보, 신발 사이즈, 선호하는 신발에 관한 내용을 담은 고객 카드를 작성하고,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수백 명의 고객과 편지를 주고받았다.고객들은 존슨의 편지를 기다렸다.그리고 답장을 보냈다. 그들은 존슨에게 삶, 고통, 부상에 관해 이야기했고 신발에 대한 피드백도 가감 없이 나누었다.



더불어 존슨은 산타모니카 소매점의 지점장이 되자 이 가게를 ‘달리기 마니아'들을 위한 성지로 바꿔놓았다. 안락의자를 구비해 손님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했고, 선반에는 스포츠에 관한 책을 꽂아놓았다. 오니츠카타이거를 신은 선수들의 사진으로 가게 벽을 도배하고, 오니츠카타이거 운동화가 그려진 티셔츠를 친한 고객들에게 나눠주었다. 


이 가게는 단지 신발을 파는 장소가 아니라 육상선수와 달리기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를 위한 커뮤니티였다. 존슨의 정성 어린 편지와 진심이 깃든 공간 마케팅은 고객들의 충성도로 돌아왔다. 미국에 오니츠카타이거를 파는 다른 업자가 있다는 소식을 알려준 것도, 급하게 동부 지역의 소매점을 알아볼 때 부동산 정보를귀띔해 준 것도 바로 존슨의 고객들이었다.



1960년대 달리기는 인기종목이 아니었다. 스포츠도 아니었다. 미친 사람이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 정도로만 여겨졌다. 나이키는 달리기를 대중 운동의 반열에 올림과 동시에 그들 특유의 커뮤니티 문화를 발전시켰다. 품질 좋은 신발, 고객을 향한 진심과 정성 어린 태도로 달리기가 줄 수 있는 다양한 즐거움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각인시킨 것이다.



나에게 가장 고결한 일을 찾아서 👊 ✨

필 나이트는 비록 위대한 육상 선수가 될 수는 없었지만, 스포츠의 고결한 정신을 마음 깊이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나이키라는 브랜드로 멋지게 승화시켰다. 그는 결코 돈을 벌기 위해 나이키를 성장시킨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달리기가 주는 활력과 생의 기쁨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피곤한 날이라도 매일 밤 퇴근하면 10킬로미터를 뛰었다. 어려운 문제를 앞두고도 동료들과 달리기 승부를 한 판 벌였다. 그에게 달리기는 개인적인 즐거움을 넘어 세상에 알리고 싶은 운동이고, 가치이자, 문화였다.



에디터의 생각 💡 

‘just do it’이라는 나이키 광고가 다르게 다가온다. 이전까지 그저 광고의 카피로만 보였다면, 이제는 스포츠에 대한 나이키의 열정, 필이 전하고자 하는 정신으로 읽힌다. 마음속에 ‘세상에 알리고 싶은 나만의 가치’가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펼쳐 놓아보시길. 나를 믿고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만큼 자신에게 가장 고결한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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