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행한 삶은 나쁜 삶이 아니다.
‘행복’과 ‘잘 사는 것’은 동의어가 아니다.
라이프 이즈 하드 / 키어런 세티야 / p.29
정도성 서사 라이브러리
'라이프 이즈 하드'의 저자 키어런 세티야는 27살부터 만성 통증에 시달립니다.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통증에 매사에 집중이 어렵고, 잠에 들기도 힘든 질환입니다. 눈에 보이는 질환이 아니라서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기도 어렵습니다. 8년 동안 지속적이고 반복된 고통에 시달리던 그는 35살에 삶의 공허함을 느낍니다. 게다가 얼마 후 그의 어머니마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습니다. 조금씩 잃어가던 어머니의 기억은 어느 날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질병과 외로움, 고통으로 채워진 그의 삶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불행한 삶입니다. 그런데, 그의 삶을 불행하게 만든 것 중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불행이 갑작스레 우리를 찾아왔을 때, 특히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질병의 고통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삶에는 모두 결함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한 몸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결국 노화하고, 그 과정에서 질환을 만나는 것은 필연입니다. 누구나 아픈 몸을 갖게 된다면, '어떻게 건강한 몸을 유지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어떻게 아픈 몸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필요합니다.
최근에는 기능 이상이라는 범주에 해당하는 ‘질환(disease)’과
질환이 삶의 경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하는 ‘병(illness)을
구분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고 있다.
질환은 생물학적 차원의 개념이지만,
병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현상학적’ 개념이며
삶의 상태에 관한 문제다.
라이프 이즈 하드 / 키어런 세티아 /p.49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질환’이 심해지는 상황에도 ‘병’은 나아질 수 있습니다. ‘질환’으로 인한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들이 내 삶을 뒤덮어 버리게 두는 것이 아니라, 질환 속에서도 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으로 삶을 나눈다면, 질환에 걸린 사람들은 모두 불행한 사람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키어런 세티야는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면, 자신과 같이 질환으로 고통 받고 불행한 사람은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자신이 질환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기에 던질 수 있는 질문입니다. 질환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행복과 불행으로 단순히 나눌 수 없는 순간들을 경험합니다. 행복은 우리 삶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행복’과 ‘잘 사는 것’은 동의어가 아니다.
라이프 이즈 하드 / 키어런 세티야 / p.29
키어런 세티야는 ‘행복은 일종의 기분 또는 감정’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매우 주관적인 상태며, 거짓된 삶을 살아도 인간은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 <매트릭스>에서 인간들은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기계 속에서, 기계에 의해 조작된 가상의 현실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가상의 현실은 꽤나 만족스럽지만 '잘 사는 삶'이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하긴 어렵습니다.
행복에 대한 갈망이 만드는 불행
키어런 세티야에 따르면, 행복에 대한 우리의 맹목적인 갈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선의 삶의 형태로써 ‘부족한 것이 없는 삶’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통과 어려움, 결핍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한국인이 살면서 암에 걸릴 확률은 38%라고 합니다. 3인 가족 중 한 명은 암환자가 될 확률이 큽니다. 기준점을 행복에 둔다면 한국인의 3명 중 1명은 필연적으로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행복한 삶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삶의 수많은 가능성을 차단하게 됩니다.
조현병을 갖고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수학자 존 내쉬, 루게릭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인류 과학사에 엄청난 족적을 남긴 스티븐 호킹까지 그들의 삶을 ‘완벽함’과 ‘행복’으로 정의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삶의 고통 속에서도 그들은 '좋은 삶'을 선택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좋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회복할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은 5가지의 감정을 경험합니다. 자신들이 죽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현실을 부정하거나 분노하고, 신에게 협상을 하기도 하고, 우울감을 지나서 최종적으로 수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삶에 대해 집착이 전혀 없는 ‘데커섹시스’ 상태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항상 어두운 감정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학의 대가로 불리는 정신과 전문의 퀴블러 로스에 따르면 죽음을 수용하는 이 모든 과정 속에서도 밑바탕에는 ‘희망’이 놓여 있습니다. 다시 건강해질 것이라는 희망은 아닙니다.
회복할 가능성이 없더라도 ‘종교적 가치’, ‘가족 간의 사랑’, 혹은 ‘자신이 평생을 지켜왔던 신념’이 죽은 후에도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이겠죠. 자신이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있다면, 죽음 앞에서도 우리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삶이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불행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희망을 품은 삶이 좋은 삶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내 삶의 가치가 명확하다면, 우리는 언제나 좋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불행한 삶은 나쁜 삶이 아니다.
‘행복’과 ‘잘 사는 것’은 동의어가 아니다.
라이프 이즈 하드 / 키어런 세티야 / p.29
정도성 서사 라이브러리
'라이프 이즈 하드'의 저자 키어런 세티야는 27살부터 만성 통증에 시달립니다.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통증에 매사에 집중이 어렵고, 잠에 들기도 힘든 질환입니다. 눈에 보이는 질환이 아니라서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기도 어렵습니다. 8년 동안 지속적이고 반복된 고통에 시달리던 그는 35살에 삶의 공허함을 느낍니다. 게다가 얼마 후 그의 어머니마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습니다. 조금씩 잃어가던 어머니의 기억은 어느 날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질병과 외로움, 고통으로 채워진 그의 삶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불행한 삶입니다. 그런데, 그의 삶을 불행하게 만든 것 중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불행이 갑작스레 우리를 찾아왔을 때, 특히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질병의 고통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삶에는 모두 결함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한 몸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결국 노화하고, 그 과정에서 질환을 만나는 것은 필연입니다. 누구나 아픈 몸을 갖게 된다면, '어떻게 건강한 몸을 유지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어떻게 아픈 몸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필요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질환’이 심해지는 상황에도 ‘병’은 나아질 수 있습니다. ‘질환’으로 인한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들이 내 삶을 뒤덮어 버리게 두는 것이 아니라, 질환 속에서도 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으로 삶을 나눈다면, 질환에 걸린 사람들은 모두 불행한 사람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키어런 세티야는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면, 자신과 같이 질환으로 고통 받고 불행한 사람은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자신이 질환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기에 던질 수 있는 질문입니다. 질환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행복과 불행으로 단순히 나눌 수 없는 순간들을 경험합니다. 행복은 우리 삶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키어런 세티야는 ‘행복은 일종의 기분 또는 감정’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매우 주관적인 상태며, 거짓된 삶을 살아도 인간은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 <매트릭스>에서 인간들은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기계 속에서, 기계에 의해 조작된 가상의 현실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가상의 현실은 꽤나 만족스럽지만 '잘 사는 삶'이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하긴 어렵습니다.
행복에 대한 갈망이 만드는 불행
키어런 세티야에 따르면, 행복에 대한 우리의 맹목적인 갈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선의 삶의 형태로써 ‘부족한 것이 없는 삶’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통과 어려움, 결핍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한국인이 살면서 암에 걸릴 확률은 38%라고 합니다. 3인 가족 중 한 명은 암환자가 될 확률이 큽니다. 기준점을 행복에 둔다면 한국인의 3명 중 1명은 필연적으로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행복한 삶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삶의 수많은 가능성을 차단하게 됩니다.
죽음 앞에서도 좋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회복할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은 5가지의 감정을 경험합니다. 자신들이 죽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현실을 부정하거나 분노하고, 신에게 협상을 하기도 하고, 우울감을 지나서 최종적으로 수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삶에 대해 집착이 전혀 없는 ‘데커섹시스’ 상태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항상 어두운 감정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학의 대가로 불리는 정신과 전문의 퀴블러 로스에 따르면 죽음을 수용하는 이 모든 과정 속에서도 밑바탕에는 ‘희망’이 놓여 있습니다. 다시 건강해질 것이라는 희망은 아닙니다.
회복할 가능성이 없더라도 ‘종교적 가치’, ‘가족 간의 사랑’, 혹은 ‘자신이 평생을 지켜왔던 신념’이 죽은 후에도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이겠죠. 자신이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있다면, 죽음 앞에서도 우리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삶이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불행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희망을 품은 삶이 좋은 삶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내 삶의 가치가 명확하다면, 우리는 언제나 좋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