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레터를 시작하기 전에 의견을 듣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동안은 앱만 있었는데, 이제는 회사에서나 집에서 큰 화면으로 편하게 보실 수 있도록 저희가 운영하는 도서 요약 서비스인 '에픽어스'의 웹버전을 출시하려고 합니다.
실은 회사에서 일하면서도 슬쩍슬쩍 보실 수 있도록 웹버전을 출시하려고 합니다. 웹버전을 출시하면서 서비스 이름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동안 에픽어스로 불렸던 서비스의 이름을 뭘로 바꿀지 고민입니다.
지금 생각한 것은 '데일리 서사'입니다. 마치 신문처럼 매일 같이 콘텐츠가 업데이트되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 이 이름을 생각했습니다. 실은 '서사일보'까지 생각했다가...다들 너무 말리셔서 참았습니다.
00서사, 0000서사 혹은 서사000, 서사00식으로 서사가 들어간 이름 좀...애정을 담아 제안 부탁드립니다.

실패가 힘든 것은 성공하지 못했다는 좌절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동안 나의 노력과 시간들이 무의미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을 넓은 시각으로 조망하지 못합니다. 대니얼 길버트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미래를 조망하는 것은 현재의 투사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결국, 실패를 했던 시점에는 밝은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가 성공하려고 애쓰는 것은 단순히 성공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보낸 시간들을 가치 있다고 증명하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삶에서 실패는 필연입니다. 항상 만납니다. 아니 자주 만나죠. 우리가 잘 살기 위해서는 실패하지 않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실패를 어떻게 다루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실패로부터의 상처를 최소화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쉽게 떠오르는 것이 '가치'입니다. 일과 삶의 방향을 성취가 아니라 '가치'의 실현에 두게 되면 좀 더 자유롭게 됩니다. 내가 비록 실패했더라도, 내가 믿는 가치를 위해 한 발 나아갔다는 내러티브가 우리를 좌절에서 구원할 수 있죠. 왠지 가치를 추구하면, 삶에서 만나는 수 많은 어두움에서 우리를 구해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아주 가끔씩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정말 삶의 모든 헛헛함에서 구원해줄까?
존 윌리엄스의 '아우구스투스'를 읽다 보면, 삶에서 찾아오는 불안함과 허망함은 성공과 성취, 가치의 실현과는 상관없이 필연적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존 윌리엄스는 '스토너'와 '부처스 크로싱'의 저자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첫 번째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삶을 다룹니다. BC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시점부터 그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카이사르의 양자였지만 아무런 세력도 없었던 그가 어떻게 로마의 질서를 회복하고, 팍스 로마나를 이루었는지를 편지와 일기를 통해 바라봅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삶은 성취를 놓고 보면 성공적이었습니다. 심지어 성취의 목적이 가치 지향적이기까지 했죠. 내가 속한 공동체(로마)의 안정과 번영이었으니까요. 그의 삶에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위기가 실패로 이어진 적은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극복했죠.
그러나 극복하는 과정이 호쾌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조하다. 불안해서 미치겠다. 처음으로 우리의 길이 옳은지 자신이 없어졌다. 성공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난제를 드러내고, 승리는 예외 없이 패배의 가능성을 키워준다."
위 문장처럼, 옥타비우스는 계속해서 어려움을 극복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언제나 불안하고, 자신의 길이 옳은지에 대한 끝없는 의심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아주 성실하게, 자신의 가치와 의무를 수행하며 혼란에 빠진 로마를 구원하고 팍스 로마나를 이룹니다. 팍스 로마나를 이룩하고, 거대한 성취를 이루었던 아우구스투스마저 삶의 마지막에는 허무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치를 따른 삶을 살았고, 아주 성실하게 성취까지 한 삶의 끝이 이렇게 허무하구나라는 헛헛함이 몰려옵니다.
"아, 우리 희극도 다 끝나가네. 그런데 이 희극이 너무 슬프군.'
소설에서는 아우구스투스가 느끼는 허무함의 원인을 유추할 수 있도록 했지만, 그 원인들이 크게 와닿지 않습니다. 그저 삶의 필연이라는 생각이 들뿐입니다.
젊은 아우구스투스의 삶을 다룰 때에는 철저하게 제 3자들의 기록으로 전개됩니다. 주변 인물들의 편지, 일기 등을 통해 그의 삶을 다루죠. 그의 이미지는 생생하지만, 감정은 알기 힘듭니다. 우리가 일 속에 파묻혀, 관계 속에 파묻혀 살 때에는 그런 모습일 것 같습니다. 뭘하고 있는지는 알지만, 내가 무슨 감정과 생각을 하는지는 나 스스로도 잘 모르는 상태말이죠. 그의 목소리가 직접 등장하는 것은 마지막부분입니다. 꺼져가는 촛불처럼 쇠잔해졌을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읽다보면 관계 속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다가, 결국 죽음을 직면하게 되었을 때 '나'를 돌아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렇게 전개되다보니, 책 전체에 허무함과 외로움의 정서가 관통합니다. 읽다가 '이 책... 너무 늦가을 낙엽같네'라고 생각하며 책 표지를 봤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연상케하는 표지더군요. 바짝 마른 낙엽과 같은 색깔에, 승리의 월계관에서는 잎새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허무함을 선사했다면, 답도 주면 좋으련만 이 책은 그 어떠한 해답도 주지 않습니다.
그저 묻습니다. 언제가는 맞닿게 될 거대한 삶의 허무를 어떻게 감당하겠냐고요.
저도 허무함에 허우적대지 않기 위해, 왜 사는지에 대해서 깊게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서사레터를 시작하기 전에 의견을 듣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동안은 앱만 있었는데, 이제는 회사에서나 집에서 큰 화면으로 편하게 보실 수 있도록 저희가 운영하는 도서 요약 서비스인 '에픽어스'의 웹버전을 출시하려고 합니다.
실은 회사에서 일하면서도 슬쩍슬쩍 보실 수 있도록 웹버전을 출시하려고 합니다. 웹버전을 출시하면서 서비스 이름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동안 에픽어스로 불렸던 서비스의 이름을 뭘로 바꿀지 고민입니다.
지금 생각한 것은 '데일리 서사'입니다. 마치 신문처럼 매일 같이 콘텐츠가 업데이트되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 이 이름을 생각했습니다. 실은 '서사일보'까지 생각했다가...다들 너무 말리셔서 참았습니다.
00서사, 0000서사 혹은 서사000, 서사00식으로 서사가 들어간 이름 좀...애정을 담아 제안 부탁드립니다.
실패가 힘든 것은 성공하지 못했다는 좌절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동안 나의 노력과 시간들이 무의미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을 넓은 시각으로 조망하지 못합니다. 대니얼 길버트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미래를 조망하는 것은 현재의 투사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결국, 실패를 했던 시점에는 밝은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가 성공하려고 애쓰는 것은 단순히 성공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보낸 시간들을 가치 있다고 증명하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삶에서 실패는 필연입니다. 항상 만납니다. 아니 자주 만나죠. 우리가 잘 살기 위해서는 실패하지 않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실패를 어떻게 다루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실패로부터의 상처를 최소화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쉽게 떠오르는 것이 '가치'입니다. 일과 삶의 방향을 성취가 아니라 '가치'의 실현에 두게 되면 좀 더 자유롭게 됩니다. 내가 비록 실패했더라도, 내가 믿는 가치를 위해 한 발 나아갔다는 내러티브가 우리를 좌절에서 구원할 수 있죠. 왠지 가치를 추구하면, 삶에서 만나는 수 많은 어두움에서 우리를 구해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아주 가끔씩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정말 삶의 모든 헛헛함에서 구원해줄까?
존 윌리엄스의 '아우구스투스'를 읽다 보면, 삶에서 찾아오는 불안함과 허망함은 성공과 성취, 가치의 실현과는 상관없이 필연적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존 윌리엄스는 '스토너'와 '부처스 크로싱'의 저자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첫 번째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삶을 다룹니다. BC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시점부터 그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카이사르의 양자였지만 아무런 세력도 없었던 그가 어떻게 로마의 질서를 회복하고, 팍스 로마나를 이루었는지를 편지와 일기를 통해 바라봅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삶은 성취를 놓고 보면 성공적이었습니다. 심지어 성취의 목적이 가치 지향적이기까지 했죠. 내가 속한 공동체(로마)의 안정과 번영이었으니까요. 그의 삶에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위기가 실패로 이어진 적은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극복했죠.
그러나 극복하는 과정이 호쾌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조하다. 불안해서 미치겠다. 처음으로 우리의 길이 옳은지 자신이 없어졌다. 성공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난제를 드러내고, 승리는 예외 없이 패배의 가능성을 키워준다."
위 문장처럼, 옥타비우스는 계속해서 어려움을 극복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언제나 불안하고, 자신의 길이 옳은지에 대한 끝없는 의심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아주 성실하게, 자신의 가치와 의무를 수행하며 혼란에 빠진 로마를 구원하고 팍스 로마나를 이룹니다. 팍스 로마나를 이룩하고, 거대한 성취를 이루었던 아우구스투스마저 삶의 마지막에는 허무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치를 따른 삶을 살았고, 아주 성실하게 성취까지 한 삶의 끝이 이렇게 허무하구나라는 헛헛함이 몰려옵니다.
"아, 우리 희극도 다 끝나가네. 그런데 이 희극이 너무 슬프군.'
소설에서는 아우구스투스가 느끼는 허무함의 원인을 유추할 수 있도록 했지만, 그 원인들이 크게 와닿지 않습니다. 그저 삶의 필연이라는 생각이 들뿐입니다.
젊은 아우구스투스의 삶을 다룰 때에는 철저하게 제 3자들의 기록으로 전개됩니다. 주변 인물들의 편지, 일기 등을 통해 그의 삶을 다루죠. 그의 이미지는 생생하지만, 감정은 알기 힘듭니다. 우리가 일 속에 파묻혀, 관계 속에 파묻혀 살 때에는 그런 모습일 것 같습니다. 뭘하고 있는지는 알지만, 내가 무슨 감정과 생각을 하는지는 나 스스로도 잘 모르는 상태말이죠. 그의 목소리가 직접 등장하는 것은 마지막부분입니다. 꺼져가는 촛불처럼 쇠잔해졌을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읽다보면 관계 속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다가, 결국 죽음을 직면하게 되었을 때 '나'를 돌아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렇게 전개되다보니, 책 전체에 허무함과 외로움의 정서가 관통합니다. 읽다가 '이 책... 너무 늦가을 낙엽같네'라고 생각하며 책 표지를 봤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연상케하는 표지더군요. 바짝 마른 낙엽과 같은 색깔에, 승리의 월계관에서는 잎새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허무함을 선사했다면, 답도 주면 좋으련만 이 책은 그 어떠한 해답도 주지 않습니다.
그저 묻습니다. 언제가는 맞닿게 될 거대한 삶의 허무를 어떻게 감당하겠냐고요.
저도 허무함에 허우적대지 않기 위해, 왜 사는지에 대해서 깊게 고민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