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만의 서사레터입니다.
한강 작가님의 첫 번째 소설집 '여수의 사랑'을 읽고 쓴 레터지만, 내용 스포는 1도 없습니다. 마음 푹 놓고 읽으셔도 됩니다.

'여수의 사랑'을 읽었습니다. 여러 편의 단편소설들이 있는데, 모든 소설들마다 불편함으로 가득 찼습니다. 주인공의 정서에는 공감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상황이나 행동은 따라가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표준화된 가족의 행복’에서 궤도 이탈을 한 사람들이 주로 등장합니다. 부모님이 건강하고, 그 아래에 화목한 자식들이 있는 구성, 혹은 화목하게 행복한 부부들. 우리가 '행복한 가족'이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릴 법한 이미지에서 모두 빗겨나가 있는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더 불행합니다. 읽고 있으면 주인공과 다른 등장인물들이 벌이는 치열한 '불행배틀'을 직관하는 기분입니다.
각자가 그리고 있는 행복 아니 우리가 원하는 행복의 궤도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초조함과 쓸쓸함에 공감하지만, 마음은 너무너무 답답합니다. 소설 속에서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에 애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자포자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습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합니다.
여수의 사랑이 불편한 것은 바로 그 지점입니다. 등장인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삶이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느낌이 없습니다. 읽다 보면 인간의 노력은 운명을 넘어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죠.
도대체 한강 작가님은 왜 이렇게 불편한 상황과 감정을 끄집어내려고 하실까. 아무리 고민해도 납득이 가지 않더군요.
의문이 풀리지 않을 때에는 문제집의 답지를 훔쳐보듯이, 책 뒷편에 나온 평론가의 해설을 읽을 수 있지만 애써 읽지 않았습니다. 책 날개를 다시 봤습니다. 아주 담담하게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라는 작가의 이력이 눈에 띕니다. 노벨상을 받은 작가의 의도가 있을 거야. 다시 책으로 시선을 향했습니다. 마치 어려운 수학 문제를 만났는데, 답안지를 보지 않고 기필코 내 힘으로 풀겠다고 끙끙대는 것처럼 다시 책을 뒤적였습니다.
밑줄을 긋고, 낙서하듯이 적은 문장을 다시 읽어봤습니다. 어느 부분은 찾아 읽기도 했습니다. 결국 납득할 만한 저만의 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괜히 찜찜해서, 다음 번에는 한강 작가의 다른 책에 도전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순간, 노벨문학상이 우리를 트레이닝시키네? 라며 쭝얼거렸습니다. 아마 전국에 있는 수많은 독자들이 저와 비슷하게 한강 작가님의 책을 읽으며 갸우뚱했을 것입니다. 그들도 저처럼 납득할 수 없는 책을 ‘재미없다’라는 손쉬운 표현으로 낙인찍지 않고 의미를 고민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벨상 작가가 쓴 책이니까요.
우리는 노벨상 덕분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내가 재미없다고 느낀 책을 끝까지 읽게 하는 훈련을 하는 셈입니다. 학생도 아닌 성인들이 말입니다. 노벨상이 한 사회의 역량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면, 훌륭한 작품이나 작가를 보유한 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숏츠가 범람하면서 모두의 인내력이 짧아지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시간을 경험하게 해준 것이 가장 큰 소득같습니다. 저는 비록 '여수의 사랑'을 읽으며 납득할 만한 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여수의 사랑을 읽고 납득할 만한 자신만의 답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런 경험 덕분에 나의 취향과 조금 다르거나 어려운 작품을 만나도 고민하며 읽어가는 아주아주 능동적인 독자가 조금은 더 생겨났을 것입니다.
오랜 만의 서사레터입니다.
한강 작가님의 첫 번째 소설집 '여수의 사랑'을 읽고 쓴 레터지만, 내용 스포는 1도 없습니다. 마음 푹 놓고 읽으셔도 됩니다.
'여수의 사랑'을 읽었습니다. 여러 편의 단편소설들이 있는데, 모든 소설들마다 불편함으로 가득 찼습니다. 주인공의 정서에는 공감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상황이나 행동은 따라가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표준화된 가족의 행복’에서 궤도 이탈을 한 사람들이 주로 등장합니다. 부모님이 건강하고, 그 아래에 화목한 자식들이 있는 구성, 혹은 화목하게 행복한 부부들. 우리가 '행복한 가족'이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릴 법한 이미지에서 모두 빗겨나가 있는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더 불행합니다. 읽고 있으면 주인공과 다른 등장인물들이 벌이는 치열한 '불행배틀'을 직관하는 기분입니다.
각자가 그리고 있는 행복 아니 우리가 원하는 행복의 궤도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초조함과 쓸쓸함에 공감하지만, 마음은 너무너무 답답합니다. 소설 속에서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에 애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자포자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습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합니다.
여수의 사랑이 불편한 것은 바로 그 지점입니다. 등장인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삶이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느낌이 없습니다. 읽다 보면 인간의 노력은 운명을 넘어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죠.
도대체 한강 작가님은 왜 이렇게 불편한 상황과 감정을 끄집어내려고 하실까. 아무리 고민해도 납득이 가지 않더군요.
의문이 풀리지 않을 때에는 문제집의 답지를 훔쳐보듯이, 책 뒷편에 나온 평론가의 해설을 읽을 수 있지만 애써 읽지 않았습니다. 책 날개를 다시 봤습니다. 아주 담담하게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라는 작가의 이력이 눈에 띕니다. 노벨상을 받은 작가의 의도가 있을 거야. 다시 책으로 시선을 향했습니다. 마치 어려운 수학 문제를 만났는데, 답안지를 보지 않고 기필코 내 힘으로 풀겠다고 끙끙대는 것처럼 다시 책을 뒤적였습니다.
밑줄을 긋고, 낙서하듯이 적은 문장을 다시 읽어봤습니다. 어느 부분은 찾아 읽기도 했습니다. 결국 납득할 만한 저만의 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괜히 찜찜해서, 다음 번에는 한강 작가의 다른 책에 도전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순간, 노벨문학상이 우리를 트레이닝시키네? 라며 쭝얼거렸습니다. 아마 전국에 있는 수많은 독자들이 저와 비슷하게 한강 작가님의 책을 읽으며 갸우뚱했을 것입니다. 그들도 저처럼 납득할 수 없는 책을 ‘재미없다’라는 손쉬운 표현으로 낙인찍지 않고 의미를 고민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벨상 작가가 쓴 책이니까요.
우리는 노벨상 덕분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내가 재미없다고 느낀 책을 끝까지 읽게 하는 훈련을 하는 셈입니다. 학생도 아닌 성인들이 말입니다. 노벨상이 한 사회의 역량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면, 훌륭한 작품이나 작가를 보유한 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숏츠가 범람하면서 모두의 인내력이 짧아지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시간을 경험하게 해준 것이 가장 큰 소득같습니다. 저는 비록 '여수의 사랑'을 읽으며 납득할 만한 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여수의 사랑을 읽고 납득할 만한 자신만의 답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런 경험 덕분에 나의 취향과 조금 다르거나 어려운 작품을 만나도 고민하며 읽어가는 아주아주 능동적인 독자가 조금은 더 생겨났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