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이강소는 누구?
이강소 작가님은 현대 미술 선구자이자 실험적 예술 운동의 주요인물이라고 합니다. '.....이라고 합니다'라고 표현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저는 현대 미술을 모릅니다. 이강소 작가님의 풍래수면시 전시는 서사 단골께서 도슨트를 하셔서 소개를 받았습니다.
원래 교보문고에서 책을 보러 가려다가, 문득 소개해주셨던 전시가 현대미술관이었던 것을 떠올려서 ... 가보았습니다.
도슨트 설명이 무려 45분이지만, 마치 15분처럼 느껴집니다. 다들 기회가 되면 꼭 관람해보시길 바랍니다. 설명과 함께요.
저는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작가의 초기작이었습니다. 이름을 모르겠네요.
이 작품에서 작품이 완성될 수록 작가의 모습이 사라지는 장면이었습니다.
이강소 작가는 작품에서 자신의 존재감이 강렬하게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작품을 만들 때, 자아가 강렬하게 느껴진다면, 자신이 어떤 의도에 따라 그리고 있다고 느껴진다면, 붓을 놓는다고 합니다.
그에게 작품이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작품은 이미 존재하고 있고, 자신은 그냥 작품을 만들어가는 도구라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나의 페인팅 이미지들은 나의 의도와 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며
새로운 이미지이 산출, 그 자체에서 이미 그려지는 것이다
(이강소,1992)
얼마 전 피아니스트 조성진 님의 영상에서도 비슷한 걸 봤습니다. 쇼팽의 발라드 4번을 연주하기 전에 이야기합니다.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이 곡은 시작을 연주하지 않아요. 곡은 이미 시작되고 있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는 음악은 이미 존재하고 있고, 자신의 음악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2. 나보다는 작품.
조성진 님이나 이강소 작가의 의도를 듣고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예술가들은 에고가 굉장히 강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을 통해 자신의 메세지를 전달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만큼 작품 속에서 '나'를 드러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조성진이나 이강소 작가 모두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자신을 위해 작품이 존재하고, 결과물에서 자신의 흔적이 남질 않길 바랍니다.
그 둘은 장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라고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정말 오늘 오후 내내 생각했습니다.
아마 이강소 작가는 자신이 하는 일을 너무 사랑해서일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너무 사랑하고, 자신의 작품을 너무 사랑해서 나라는 존재가 돋보이는 것보다는 작품이 중요한 것이겠죠.
3.일을 통해 증명하려는 사람 VS 일을 좋아하는 사람
이강소 작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우리가 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두 작가처럼 일을 사랑..아니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편에는 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일을 통해 자신을 증명한다는 표현이 좀더 적확한 것 같습니다.
둘다 일에 대한 몰입도가 높습니다. 열정도 크고요. 일이 잘 풀리고 성과가 날 때는 둘 사이의 차이는 별로 없습니다. 다만, 일이 뜻하는 대로 되지 않을 데, 어려움을 만날 때 둘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일을 통해 내가 빛나길 원하는 사람, 아니 힙합에서 이야기하듯이 일을 통해 나를 증명하려고 했던 사람은
원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감정적으로 많이 흔들립니다. 그리고 사고가 터지고 나면, Who에 집착합니다.

책임소재를 따지고, 누가 왜 그랬는 지를 따집니다. 일을 통해 나를 증명해야 하는데, 원하는 결과가 안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책임을 져야 하는 타인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훼손되지 않습니다.
책임지는 타인이 존재함으로써, 위기 상황에서도 나는 온전하게 보전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who가 아니라 how가 중요합니다.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고 어려움을 만났다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더 중요합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문제 해결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함께 고민합니다.
둘 사이의 결과의 차이가 있다고는 말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때로는 일의 결과는 일을 대하는 태도보다는 실력이 중요하거나, 운이 중요할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타인과 함께 하는 일을 한다면,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성과가 더 좋을 확률이 클 것 같습니다.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은 세우지만, 항상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일의 특징입니다.
어려움을 만날 때, 누구냐를 따지는 사람보다 어떻게를 고민하는 사람과 일할 때 심리적 안전감이 클 수 밖에 없으니까요.
심리적 안전감 덕분에 실패나 어려움 속에서도 한 발 더 나아가는 게 쉽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마냥 힘들고 어렵지만은 않겠죠. 추억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4. 삶을 따뜻하게 하는 태도.
이강소 작가의 소멸입니다. 1973년의 예술입니다. 이 당시에 센세이션한 전시였다고 합니다.
선술집을 재현해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도록 했으니까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 전시는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로 제작한 것입니다.
이강소 작가의 작품은 오리지널리티가 중요하지 않다고 설명해주시더군요. 73년 전시에서 쓰였던 가구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날 그 전시를 관람했던 사람들이 느꼈던 그날의 온도와 습도, 기억들이 중요합니다.
물질적인 것들은 소멸하겠지만, 각자의 기억은 영원할 수 있으니까요.
일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결과도 중요하고 성과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모든 것들이 소멸하고, 내가 그 당시에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온도가 더 크게 남을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내가 일을 대하는 태도가 일을 통해 만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합니다.
'일을 통해 나를 증명하기'보다는, '내 일을 사랑하는 것'이 내 삶을 더 따뜻하게 만든다고 믿고 싶습니다.
1. 이강소는 누구?
이강소 작가님은 현대 미술 선구자이자 실험적 예술 운동의 주요인물이라고 합니다. '.....이라고 합니다'라고 표현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저는 현대 미술을 모릅니다. 이강소 작가님의 풍래수면시 전시는 서사 단골께서 도슨트를 하셔서 소개를 받았습니다.
원래 교보문고에서 책을 보러 가려다가, 문득 소개해주셨던 전시가 현대미술관이었던 것을 떠올려서 ... 가보았습니다.
도슨트 설명이 무려 45분이지만, 마치 15분처럼 느껴집니다. 다들 기회가 되면 꼭 관람해보시길 바랍니다. 설명과 함께요.
저는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작가의 초기작이었습니다. 이름을 모르겠네요.
이 작품에서 작품이 완성될 수록 작가의 모습이 사라지는 장면이었습니다.
이강소 작가는 작품에서 자신의 존재감이 강렬하게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작품을 만들 때, 자아가 강렬하게 느껴진다면, 자신이 어떤 의도에 따라 그리고 있다고 느껴진다면, 붓을 놓는다고 합니다.
그에게 작품이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작품은 이미 존재하고 있고, 자신은 그냥 작품을 만들어가는 도구라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나의 페인팅 이미지들은 나의 의도와 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며
새로운 이미지이 산출, 그 자체에서 이미 그려지는 것이다
(이강소,1992)
얼마 전 피아니스트 조성진 님의 영상에서도 비슷한 걸 봤습니다. 쇼팽의 발라드 4번을 연주하기 전에 이야기합니다.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이 곡은 시작을 연주하지 않아요. 곡은 이미 시작되고 있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는 음악은 이미 존재하고 있고, 자신의 음악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2. 나보다는 작품.
조성진 님이나 이강소 작가의 의도를 듣고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예술가들은 에고가 굉장히 강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을 통해 자신의 메세지를 전달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만큼 작품 속에서 '나'를 드러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조성진이나 이강소 작가 모두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자신을 위해 작품이 존재하고, 결과물에서 자신의 흔적이 남질 않길 바랍니다.
그 둘은 장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라고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정말 오늘 오후 내내 생각했습니다.
아마 이강소 작가는 자신이 하는 일을 너무 사랑해서일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너무 사랑하고, 자신의 작품을 너무 사랑해서 나라는 존재가 돋보이는 것보다는 작품이 중요한 것이겠죠.
3.일을 통해 증명하려는 사람 VS 일을 좋아하는 사람
이강소 작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우리가 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두 작가처럼 일을 사랑..아니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편에는 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일을 통해 자신을 증명한다는 표현이 좀더 적확한 것 같습니다.
둘다 일에 대한 몰입도가 높습니다. 열정도 크고요. 일이 잘 풀리고 성과가 날 때는 둘 사이의 차이는 별로 없습니다. 다만, 일이 뜻하는 대로 되지 않을 데, 어려움을 만날 때 둘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일을 통해 내가 빛나길 원하는 사람, 아니 힙합에서 이야기하듯이 일을 통해 나를 증명하려고 했던 사람은
원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감정적으로 많이 흔들립니다. 그리고 사고가 터지고 나면, Who에 집착합니다.
책임소재를 따지고, 누가 왜 그랬는 지를 따집니다. 일을 통해 나를 증명해야 하는데, 원하는 결과가 안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책임을 져야 하는 타인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훼손되지 않습니다.
책임지는 타인이 존재함으로써, 위기 상황에서도 나는 온전하게 보전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who가 아니라 how가 중요합니다.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고 어려움을 만났다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더 중요합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문제 해결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함께 고민합니다.
둘 사이의 결과의 차이가 있다고는 말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때로는 일의 결과는 일을 대하는 태도보다는 실력이 중요하거나, 운이 중요할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타인과 함께 하는 일을 한다면,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성과가 더 좋을 확률이 클 것 같습니다.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은 세우지만, 항상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일의 특징입니다.
어려움을 만날 때, 누구냐를 따지는 사람보다 어떻게를 고민하는 사람과 일할 때 심리적 안전감이 클 수 밖에 없으니까요.
심리적 안전감 덕분에 실패나 어려움 속에서도 한 발 더 나아가는 게 쉽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마냥 힘들고 어렵지만은 않겠죠. 추억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4. 삶을 따뜻하게 하는 태도.
이강소 작가의 소멸입니다. 1973년의 예술입니다. 이 당시에 센세이션한 전시였다고 합니다.
선술집을 재현해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도록 했으니까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 전시는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로 제작한 것입니다.
이강소 작가의 작품은 오리지널리티가 중요하지 않다고 설명해주시더군요. 73년 전시에서 쓰였던 가구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날 그 전시를 관람했던 사람들이 느꼈던 그날의 온도와 습도, 기억들이 중요합니다.
물질적인 것들은 소멸하겠지만, 각자의 기억은 영원할 수 있으니까요.
일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결과도 중요하고 성과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모든 것들이 소멸하고, 내가 그 당시에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온도가 더 크게 남을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내가 일을 대하는 태도가 일을 통해 만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합니다.
'일을 통해 나를 증명하기'보다는, '내 일을 사랑하는 것'이 내 삶을 더 따뜻하게 만든다고 믿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