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익숙하다'를 '안다'로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공부를 할 때는 익숙함을 앎으로 착각하고, 관계에서의 익숙함은 우정이라고 착각했죠. '나'에 대해서도 비슷합니다.
누구에게나 '나'란 존재는 익숙함을 넘어, 아주 당연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보니 '나'를 잘안다고 쉽게 생각합니다.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와 동일할 것이라 착각하고, '혼자 있는 나'와 '관계 속의 나'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잘 알고 있다'는 착각때문에 원치 않은 실수를 많이 하기도 했다. 다행인 건(?) 이런 류의 착각이 일반적이라는 것이죠. 저말고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착각을 하고 삽니다. 아주 다행스럽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저 혼자 주식을 망한 줄 알았는데, 친구들이 다같이 망한 걸 알고 환하게 웃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하여튼...모두가 그렇습니다.
2.
제가 심하게 편애하는 심리학자 티모시 윌슨에 따르면, '사람들은 타인의 행동은 정확히 예측하지만, 자신의 행동은 예측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 사람은 타인의 행동을 예측할 때에는 그들의 과거 '행동'을 기반으로 생각하고, 나의 행동을 예측할 때에는 내부 정보인 '내 성격'을 근거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에 대해서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우리 자아를 '의식하는 나'와 '의식하지 못하는 나' (주로 적응 무의식이라는 표현을 쓴다)로 나눠서 봐야 합니다.
솔직히, 말은 쉽습니다. 의식하는 나와 의식하지 못하는 나를 구별하는 것. 의식하지 못하는 나를 찾아낼 때, 그나마 명쾌한 것이 선택을 돌아보기입니다. 비슷한 상황에서 내가 반복적으로 어떤 선택들을 하는지 쓰다보면, 내가 인지하고 있지 못한 나를 발견합니다.
3.
내부 정보인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나의 성격'으로 '오늘의 나'를 정의하는 것은 '실제의 나'가 아닌 '내가 희망하는 나'에 가깝습니다. 예전에는 '내가 희망하는 나'를 진짜 나라고 생각하는 게 오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닙니다. 아주 효율적인 시스템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패턴은 수천만년 동안 학습된 것입니다. 원시시대 때부터 학습된 것이죠. 예를 들면,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가는 것도, 일종의 생존 본능이라고 합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나를 해칠만한 사람인지 아니면 내가 친하게 지내야 할 사람인지를 보자마자 판단해야 합니다.

[시간을 두고 알아가기에는 조금 위험한 상황]
눈 앞의 맹수를 봤는데, '아~~ 저 거대한 고양이는 어떤 존재일까? 한 번 알아봐야겠다' 혹은 '창을 든 낯선 부족을 보고는, 저사람을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충분히 시간을 두고 사귀면서 알아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원시인은 그날 저녁 거대한 고양이의 뱃 속에 들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을 든 낯선 부족의 노예가 될 수도 있고요.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알 수 있다는 마인드는 나를 죽음으로 몰 수 있습니다. 찰나간에 사람에 대한 호불호를 결정하는 것은 오늘 날에는 편견처럼 느껴지지만, 긴 시간을 야생에서 살았던 인간에게는 생존에 필수였습니다.
4.

[나는 백강혁이다...그가 현실을 이겨내는 방식]
실제 내 모습과 거리가 멀더라도, '내가 희망하는 나'를 진짜라고 믿는 것도 문득 이와 비슷하단 생각이 듭니다. 실제의 나로는 내 앞의 현실을 헤쳐나갈 용기가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현실을 이겨나가기 위해서는 '내가 희망하는 나'가 더 적합할 수도 있겠죠. 얼마 전 중증외상센터에서 아주 웃긴 장면을 봤습니다. 주인공인 백강혁 교수와 전혀 다른 캐릭터인 한유림 교수가 위기에 빠지자 스스로를 세뇌합니다. '나는 백강혁이다'라고요. 그의 현실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백강혁이라고 세뇌했어야 하는 것이죠.
살다보면 '내가 희망하는 내'가 필요한 날이 있습니다. 그런 날에는 스스로를 세뇌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렇게 믿고 행동하다보면, 내가 희망하는 나가 진짜 내가 되는 날이 오겠죠.
1.
저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익숙하다'를 '안다'로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공부를 할 때는 익숙함을 앎으로 착각하고, 관계에서의 익숙함은 우정이라고 착각했죠. '나'에 대해서도 비슷합니다.
누구에게나 '나'란 존재는 익숙함을 넘어, 아주 당연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보니 '나'를 잘안다고 쉽게 생각합니다.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와 동일할 것이라 착각하고, '혼자 있는 나'와 '관계 속의 나'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잘 알고 있다'는 착각때문에 원치 않은 실수를 많이 하기도 했다. 다행인 건(?) 이런 류의 착각이 일반적이라는 것이죠. 저말고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착각을 하고 삽니다. 아주 다행스럽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저 혼자 주식을 망한 줄 알았는데, 친구들이 다같이 망한 걸 알고 환하게 웃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하여튼...모두가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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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심하게 편애하는 심리학자 티모시 윌슨에 따르면, '사람들은 타인의 행동은 정확히 예측하지만, 자신의 행동은 예측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 사람은 타인의 행동을 예측할 때에는 그들의 과거 '행동'을 기반으로 생각하고, 나의 행동을 예측할 때에는 내부 정보인 '내 성격'을 근거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에 대해서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우리 자아를 '의식하는 나'와 '의식하지 못하는 나' (주로 적응 무의식이라는 표현을 쓴다)로 나눠서 봐야 합니다.
솔직히, 말은 쉽습니다. 의식하는 나와 의식하지 못하는 나를 구별하는 것. 의식하지 못하는 나를 찾아낼 때, 그나마 명쾌한 것이 선택을 돌아보기입니다. 비슷한 상황에서 내가 반복적으로 어떤 선택들을 하는지 쓰다보면, 내가 인지하고 있지 못한 나를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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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정보인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나의 성격'으로 '오늘의 나'를 정의하는 것은 '실제의 나'가 아닌 '내가 희망하는 나'에 가깝습니다. 예전에는 '내가 희망하는 나'를 진짜 나라고 생각하는 게 오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닙니다. 아주 효율적인 시스템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패턴은 수천만년 동안 학습된 것입니다. 원시시대 때부터 학습된 것이죠. 예를 들면,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가는 것도, 일종의 생존 본능이라고 합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나를 해칠만한 사람인지 아니면 내가 친하게 지내야 할 사람인지를 보자마자 판단해야 합니다.
[시간을 두고 알아가기에는 조금 위험한 상황]
눈 앞의 맹수를 봤는데, '아~~ 저 거대한 고양이는 어떤 존재일까? 한 번 알아봐야겠다' 혹은 '창을 든 낯선 부족을 보고는, 저사람을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충분히 시간을 두고 사귀면서 알아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원시인은 그날 저녁 거대한 고양이의 뱃 속에 들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을 든 낯선 부족의 노예가 될 수도 있고요.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알 수 있다는 마인드는 나를 죽음으로 몰 수 있습니다. 찰나간에 사람에 대한 호불호를 결정하는 것은 오늘 날에는 편견처럼 느껴지지만, 긴 시간을 야생에서 살았던 인간에게는 생존에 필수였습니다.
4.
[나는 백강혁이다...그가 현실을 이겨내는 방식]
실제 내 모습과 거리가 멀더라도, '내가 희망하는 나'를 진짜라고 믿는 것도 문득 이와 비슷하단 생각이 듭니다. 실제의 나로는 내 앞의 현실을 헤쳐나갈 용기가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현실을 이겨나가기 위해서는 '내가 희망하는 나'가 더 적합할 수도 있겠죠. 얼마 전 중증외상센터에서 아주 웃긴 장면을 봤습니다. 주인공인 백강혁 교수와 전혀 다른 캐릭터인 한유림 교수가 위기에 빠지자 스스로를 세뇌합니다. '나는 백강혁이다'라고요. 그의 현실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백강혁이라고 세뇌했어야 하는 것이죠.
살다보면 '내가 희망하는 내'가 필요한 날이 있습니다. 그런 날에는 스스로를 세뇌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렇게 믿고 행동하다보면, 내가 희망하는 나가 진짜 내가 되는 날이 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