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어른이 겁을 내야하는 이유 (김용/소오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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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전에 서사레터, '어른이란 무엇인가?'에서 하남돼지집을 갔던 친구와 지난 주 목요일에 저녁을 먹었습니다. 고등학교 친구다 보니, 이상하게 구정과 추석 명절을 앞두면 꼭 만납니다. 추석을 앞둬서 아주 느슨해진 마음으로 이수역에서 만났습니다. 서점이 이수역으로 이전해서, 여기서 만난 것은 아닙니다. 그냥 중간지점을 찾다가... 친구가 난데없이 참치를 먹자고 하더군요. 고기를 먹을까 참치를 먹을까 고민하다가... 참치회를 선택했습니다. 식탁에 채워지는 음식들을 들뜬 마음으로 바라보며, 정말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친구의 좋은 점 같습니다. 생각하지 않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부담 없이 늘어놓을 수 있는 것. 이야기를 하다 보니, 고등학교 시절에 한참 읽던 무협지와 무협 영화가 화제로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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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강호는 소설뿐만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로도 반복적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영화로는 1990년 소오강호와 1992년 동방불패가 있습니다. 둘다 소설 소오강호를 원작으로 하죠. 드라마는 중국,홍콩,대만에서 주기적으로 매번 다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


2.

저희가 즐겨 읽던 무협 소설은 주로 '김용'이 쓴 소설입니다. 중국의 톨킨(반지의 제왕 저자)이라 불리며, 그의 소설들은 중국에서도 문학 작품으로 인정받습니다. 중국의 역사와 철학이 잘 어우러진 소설입니다. 그중에서 화두에 올랐던 것은 '소오강호'였습니다. 이 소오강호는 영화로 두 편이 만들어졌습니다. 동방불패와 '소오강호'입니다. 주인공은 검술로 유명한 '화산파'의 영호충입니다. 화산파의 서열 2위, 대사형이었던 영호충이 뜻하지 않은 오해를 받아서 화산파에서 축출되고, 기연을 얻어서 독고구검이라는 극강의 무공을 배웁니다. 그리고 마교 교주의 딸인 임영영과 사랑에 빠져서, 마교에서 반란을 일으킨 동방불패를 제압하고 강호를 떠나는 내용입니다. 원작 소설과 영화 '소오강호'에서 주인공은 도가적인 분위기와 허무주의가 깊게 묻어나옵니다. 반면, 그가 몸담고 있는 '강호의 세계'는 엄청나게 정치적입니다. 주인공의 성향과는 별개로, '이건 정치 소설인가?'란 생각이 들 정도로 문파 간의 이합집산, 권력을 향한 인간의 집착이나 욕심이 잘 드러나죠. 성인군자로 나왔던 주인공 영호충의 스승마저 이익을 위해서는 너무나도 쉽게 악이 됩니다. 이런 모습들에 환멸을 느낀 영호충은 강호를 떠나기로 결심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3.

친구와 한참을 이야기했던 소재는 '영호충이 강호를 떠난다고 결심했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였습니다. 어릴 적에는 별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냥... 뭐 세상에 환멸을 느껴서 떠나겠지...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생각해보니,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소오강호 속에서는 모든 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문파를 정해서 수련을 합니다. 우리로 따지면 어린 시절부터 예술계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졸업했고, 아주 유명한 교향악단에 취업해서 앞이 유망한 인재로 인정받은 위치입니다. 아니... 이걸로 부족하네요. 소설 속 영호충은 고아였고, 정말 어린 시절부터 문파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독고구검'이란 엄청난 무공도 익힌 상태입니다. 어린 시절의 꿈이었던 장문인 바로 아래까지 올라갔는데... 강호를 떠납니다. 이건 평생의 꿈과 모든 관계를 끊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사람에 대한 혹은 사람들의 욕심에 대한 환멸이 있어도 그러기가 쉽지 않거든요. 우리만 해도 퇴사하는 결정을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입사가 평생의 꿈도 아니었지만, 퇴사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게다가 영호충처럼 조직의 넘버 2가 되거나, 업계에서 이름만 들어도 알 정도로 성장했는데, 업계를 떠난다는 것이 상상하기 힘들었습니다. 아니 상상하기 불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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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도대체 영호충은 무슨 생각과 어떤 마음으로 강호를 떠난다고 했는지에 대해 미친 듯이 떠들어댔습니다. 참치회를 먹으면서요. 참치회를 먹으면서 한참을 이야기하던 우리의 결론은 '영호충이 꿈만 좇기에는 어른이 되어버렸다'가 결론이었습니다. 참고로... 마치 하남돼지집에서 '어른이란 무엇인가'의 파트2에 해당하는 대화 같았습니다. 우리는 대화를 하면서, 어른은 '겁이 많다' 아니, 겁이 많을 수 밖에 없다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써놓고 보니, 이건 어른의 정의가 아니라, 어른의 특징에 가깝군요. 이런 특징을 이야기한 것을 보면, 나나 그 친구나 삶에 대한 겁이 많아졌나 봅니다.

영호충도 겁이 많은 어른이었기 때문에, 평생의 꿈을 포기하고 강호를 떠나기로 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친구가 생각한 겁과 제가 생각한 겁의 원인이 좀 달랐습니다.




5.

친구가 생각하는 영호충의 겁은 '잃을 것'에 대한 겁이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잃을 게 없고, 나이 들면 잃을 게 많아지니까요. 잃을 게 많아지니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기는 하지만... 왠지 그 마음이 이해도 됩니다. 상처받기 전에 떠나는 마음이요.

제가 생각하는 영호충의 겁은 '자기다움의 상실'이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사람을 좋아하고, 정치적인 명분이 아니라 사람 간의 '의'를 중심으로 살아왔던 자기다움을 간직하면서 살기에는 불가능했겠죠. 둘이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저는 제 말이 맞다고 믿습니다. ㅋㅋ 분명 영호충은 자기다움의 상실이 겁나서 모든 것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성취가 오늘날의 '나'를 만든 '자기다움'을 훼손하면서 얻을 만한 것이 아니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불과 5~6년 전이라면, 영호충의 이러한 선택에 박수를 보냈을 것 같습니다. 자기다움을 지키는 것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지금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자기다움'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 정말 자기다움을 지켜준다고 확신하지 못하니까요. 잘못된 판단 같습니다.

그리고 자기다움이라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과거의 자기다움'입니다. 내가 지키려고 하는 자기다움이 결국 고정불변의 가치는 아닙니다. 내가 치열하게 고민했기에 더더욱 값지게 느껴질 뿐이죠. 현재 그리고 앞으로 나의 자기다움은 결국 변화합니다. 저만 해도 2019년의 자기다움과 2024년의 자기다움은 차이가 큽니다. 과거의 자기다움을 지키기 위해, 미래의 가능성을 포기한 듯 느껴졌습니다. 그렇지만, 확신은 못하겠더군요. 그날도 친구와 제가 생각하는 '겁'의 정체에 대해서는 합의하지 못한채 헤어졌습니다. 마무리 되지 못한 생각을 이어서 서사레터를 쓰는데도..결론을 못 내렸습니다. 서사레터가 아무리 편하게 쓰는 것이라도 어떤 형식으로든 결론을 내리고 싶은데, 모르겠습니다. '자기다움'을 지키기 위해 떠난다는 것이 좋은 판단인지 나쁜 판단인지... 판단을 내리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위에까지 쓰고 글을 좀 묵혀두었습니다. 글쓰기의 장점입니다. 나의 고민을 두고두고 곱씹어 볼 수 있습니다.




6.

이틀 정도 더 생각하다 보니, 다시 생각이 또 바뀌었습니다. 자기다움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 길었다면, 그 시간이 치열했다면, 강호를 떠나는 게 맞았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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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등장하는 대니얼 카너먼 교수님..)

대니얼 카너먼이나 댄 에리얼리가 지적하는 의사결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대부분의 편향은 짧은 시간의 판단을 기준으로 나올 때가 많습니다. 시간을 두고 판단을 했다고 하더라도, 시스템 1에 의존한 경우가 많죠. 이때 편향의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최근의 경험일 때가 많습니다. 최근에 내가 노출되었던 미디어, 나에게 발생했던 일, 혹은 최근에 발생한 부정성 편향, 손실에 대한 두려움 등등 의사결정에 미치는 수 많은 요소들 중에서, 유난히 최근의 사건들이 영향을 미칠 때가 많습니다. 이런 편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양한 맥락에서 충분한 시간을 두고 고민해야겠죠. 영호충처럼 아주 오랜 기간동안 자기다움에 고민한 상황이라면, 그 가치가 다양한 상황과 맥락에서 검증받았을 것입니다. 편향에 빠지지 않고, 충분히 검증했겠죠.


충분히 검증된 자기다움의 시간이 있었다면, 불확실한 미래의 가능성을 기대한 선택보다는....겁을 내는 어른의 선택이 더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상황이 바뀌어도 지켜온 자기다움이니까요.


이렇게 생각해보니 '어른은 겁이 많다'에서 '겁'이 결코 부정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어른의 겁'은 치열하게 살아온 자신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면, 겁을 내며 사는 것이 합리적이고 아주아주 당연합니다. 7. 추석 연휴가 딱 중간을 돌고 있군요. 지난 주에 한참 이사때문에 힘들때에는 서사레터가 짧았는데, 몸이 좀 편하니까 다시 좀 길어집니다. 이사는 정말 힘듭니다. 과거에는 아무리 피곤해도 꾸역꾸역 읽고, 썼는데... 이제는 정신이 몸을 이길 수 없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