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서점을 방배동으로 이전하는 것 때문에 너무너무너무 힘이 듭니다. 이번에 이전하면서 깨달았습니다.
'아 체력이 말도 안되게 떨어졌구나'
아주 오래 전에 아침일찍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하던 시절이 있었죠. 시간이 오래지났지만,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침 7시 30분에 출근했다가, 늦게 나왔다고 욕을 먹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여튼 그 시절에도 저는 읽고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부족하니, 하루에 10분의 시간을 6번 만들었습니다.
출근하면서 10분, 도착하자마자 10분, 점심시간 10분 등등 이런 식으로 하루에 10분의 시간을 6번씩 만들어서 읽고 썼죠.
저는 제 정신력이 강해서 이렇게 한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습니다. 그건 체력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신이 아니라 체력이 좋았던 거죠.
지금은 서사에서 이사 때문에 짐 몇 개 나르고, 페인트칠 조금만 해도 기진맥진합니다. 한동안 서사레터가 뜸했던 것은 힘들어서였습니다. 추석 연휴 때 발행된 두 개의 레터도 어금니 꽉깨물고 겨우 썼습니다.
체력이 떨어지면 힘들지만, 모든 것이 나쁘진 않습니다. 장점도 있죠. 힘들면 현타가 오고, 현타가 오면 '오늘의 나'를 끊임없이 의심합니다.
요즘에도 몸이 힘드니까,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방향이 맞는지에 대한 의심이 끝없이 밀려옵니다.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이 모든 것들을 감내하고 있는데 의심이 찾아오면 아주 괴롭습니다. 알면서도 괴롭습니다.
누구든지 일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의심의 시간들을 견뎌야 합니다. 내가 일과 삶에서, 특히 일에서 이루고자 하는 가치들이 정말 내가 원하는 가치인지.. 혹은 이 가치를 내가 정확히 찾은 것인지 끝임없이 물어야합니다. 멈추면 안되죠. 이런 의심의 시간이 지나야 '내 일의 의미를 찾는 확신의 시간'이 겨우 찾아옵니다. 아주 살짝이요. 아쉽게도 확신의 시간은 정말정말 짧습니다. 확신의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다시 의심의 시간이 찾아온다.
억울하긴 하지만, 당연합니다. 우리가 의심의 시간동안 던졌던 질문은 과거의 질문들입니다.
질문의 답은 현재 시점에서 찾았습니다.
결국, 과거의 질문에 대한 현재의 답을 가지고 미래를 살아갑니다. 의심의 시간이 반복적으로 찾아올 수 밖에 없습니다.

[의심의 시간이 찾아오면, 주로 걷습니다. 걸으면서 생각하고, 메모하고, 가끔은 녹음도 하고, 소리내어 말도 하고..]
그렇다면 질문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영원하지 않은 일시적인 답을 찾기 위해, 몸과 마음을 괴롭혀 가며 궁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면, 일시적인 답이라도 의미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질문의 '답을 찾았다'가 아니라, '질문 하는 삶' 그 자체입니다.
내가 질문하지 않으면 타인이나 상황이 질문을 던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흔히 '현타'가 온다라는 순간인 경우가 많죠.
내가 내 삶에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내가 원치 않은 타이밍에, 원치 않는 상황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질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상황과 타인이 던진 질문에 휘둘리며 허둥지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마치 내가 남의 이야기에 등장인물로 사는 느낌이 듭니다.
과거에 질문없이 살던 시절에 그랬습니다. 제가 질문을 던지지 않으니, 자꾸 상황이 공격적인 질문을 던지더군요.
내가 나의 일과 삶에 질문을 던지다보면, 내가 던졌던 질문들에 맥락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나의 질문을 이으면, 나만의 서사를 발견합니다. 초라한 이야기라도 내 삶의 주인공이 되는 기분입니다.
그 이야기는 남들이 보기에는 시시하고 재미없고 초라해 보일지라도, 내가 썼기 때문에 항상 재미있습니다.
모든 작가는 언제나 자기 이야기의 첫 번째 독자가 됩니다. 아무리 개떡같은 이야기도 히히덕 거리면서 읽습니다.(라고 믿습니다.)
잘쓰고 못쓰고를 떠나서 내가 쓴 이야기니까요. 마치 제가 서사레터를 즐기면서 쓰는 것처럼 말이죠.
삶이 내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들로 구성된 내러티브라는 생각이 들면, 의심의 시간들도 조금은 덜 초조합니다.
이 의심의 시간들 마저도 내 삶의 이야기에 중요한, 아니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초조하지 않다'라고 멋있게 외치고 싶지만 저는 쭈글이라서 그렇게 당당한 말을 외치지는 못합니다. 덜 초조한 게 맞습니다.
질문을 던지지만, 답을 찾지 못해도 초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의심의 시간도 내 이야기의 소중한 한 부분입니다. 주인공이 각성하기 위한 필수적인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되죠.
체력이 떨어지면서, 오만가지 의심이 찾아온 저를 위해,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썼습니다. 오늘의 의심이 나를 삶의 주인공으로 만든다고 되뇌이며 자야겠습니다.
재오픈하면, 기필코 피트니스센터를 다녀야겠습니다.
의심의 시간이 꼭 필요하지만, 자주 만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요즘 서점을 방배동으로 이전하는 것 때문에 너무너무너무 힘이 듭니다. 이번에 이전하면서 깨달았습니다.
'아 체력이 말도 안되게 떨어졌구나'
아주 오래 전에 아침일찍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하던 시절이 있었죠. 시간이 오래지났지만,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침 7시 30분에 출근했다가, 늦게 나왔다고 욕을 먹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여튼 그 시절에도 저는 읽고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부족하니, 하루에 10분의 시간을 6번 만들었습니다.
출근하면서 10분, 도착하자마자 10분, 점심시간 10분 등등 이런 식으로 하루에 10분의 시간을 6번씩 만들어서 읽고 썼죠.
저는 제 정신력이 강해서 이렇게 한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습니다. 그건 체력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신이 아니라 체력이 좋았던 거죠.
지금은 서사에서 이사 때문에 짐 몇 개 나르고, 페인트칠 조금만 해도 기진맥진합니다. 한동안 서사레터가 뜸했던 것은 힘들어서였습니다. 추석 연휴 때 발행된 두 개의 레터도 어금니 꽉깨물고 겨우 썼습니다.
체력이 떨어지면 힘들지만, 모든 것이 나쁘진 않습니다. 장점도 있죠. 힘들면 현타가 오고, 현타가 오면 '오늘의 나'를 끊임없이 의심합니다.
요즘에도 몸이 힘드니까,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방향이 맞는지에 대한 의심이 끝없이 밀려옵니다.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이 모든 것들을 감내하고 있는데 의심이 찾아오면 아주 괴롭습니다. 알면서도 괴롭습니다.
누구든지 일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의심의 시간들을 견뎌야 합니다. 내가 일과 삶에서, 특히 일에서 이루고자 하는 가치들이 정말 내가 원하는 가치인지.. 혹은 이 가치를 내가 정확히 찾은 것인지 끝임없이 물어야합니다. 멈추면 안되죠. 이런 의심의 시간이 지나야 '내 일의 의미를 찾는 확신의 시간'이 겨우 찾아옵니다. 아주 살짝이요. 아쉽게도 확신의 시간은 정말정말 짧습니다. 확신의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다시 의심의 시간이 찾아온다.
억울하긴 하지만, 당연합니다. 우리가 의심의 시간동안 던졌던 질문은 과거의 질문들입니다.
질문의 답은 현재 시점에서 찾았습니다.
결국, 과거의 질문에 대한 현재의 답을 가지고 미래를 살아갑니다. 의심의 시간이 반복적으로 찾아올 수 밖에 없습니다.
[의심의 시간이 찾아오면, 주로 걷습니다. 걸으면서 생각하고, 메모하고, 가끔은 녹음도 하고, 소리내어 말도 하고..]
그렇다면 질문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영원하지 않은 일시적인 답을 찾기 위해, 몸과 마음을 괴롭혀 가며 궁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면, 일시적인 답이라도 의미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질문의 '답을 찾았다'가 아니라, '질문 하는 삶' 그 자체입니다.
내가 질문하지 않으면 타인이나 상황이 질문을 던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흔히 '현타'가 온다라는 순간인 경우가 많죠.
내가 내 삶에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내가 원치 않은 타이밍에, 원치 않는 상황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질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상황과 타인이 던진 질문에 휘둘리며 허둥지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마치 내가 남의 이야기에 등장인물로 사는 느낌이 듭니다.
과거에 질문없이 살던 시절에 그랬습니다. 제가 질문을 던지지 않으니, 자꾸 상황이 공격적인 질문을 던지더군요.
내가 나의 일과 삶에 질문을 던지다보면, 내가 던졌던 질문들에 맥락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나의 질문을 이으면, 나만의 서사를 발견합니다. 초라한 이야기라도 내 삶의 주인공이 되는 기분입니다.
그 이야기는 남들이 보기에는 시시하고 재미없고 초라해 보일지라도, 내가 썼기 때문에 항상 재미있습니다.
모든 작가는 언제나 자기 이야기의 첫 번째 독자가 됩니다. 아무리 개떡같은 이야기도 히히덕 거리면서 읽습니다.(라고 믿습니다.)
잘쓰고 못쓰고를 떠나서 내가 쓴 이야기니까요. 마치 제가 서사레터를 즐기면서 쓰는 것처럼 말이죠.
삶이 내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들로 구성된 내러티브라는 생각이 들면, 의심의 시간들도 조금은 덜 초조합니다.
이 의심의 시간들 마저도 내 삶의 이야기에 중요한, 아니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초조하지 않다'라고 멋있게 외치고 싶지만 저는 쭈글이라서 그렇게 당당한 말을 외치지는 못합니다. 덜 초조한 게 맞습니다.
질문을 던지지만, 답을 찾지 못해도 초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의심의 시간도 내 이야기의 소중한 한 부분입니다. 주인공이 각성하기 위한 필수적인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되죠.
체력이 떨어지면서, 오만가지 의심이 찾아온 저를 위해,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썼습니다. 오늘의 의심이 나를 삶의 주인공으로 만든다고 되뇌이며 자야겠습니다.
재오픈하면, 기필코 피트니스센터를 다녀야겠습니다.
의심의 시간이 꼭 필요하지만, 자주 만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