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할수 있다는 긍정이 성과가 중요한 사회를 만들고, 모두가 피로한 사회를 만들었다..

피로사회 | 한병철

할수 있다는 긍정이 성과가 중요한 사회를 만들고, 모두가 피로한 사회를 만들었다.


“피로한 인간은 단지 실현을 소진했을 뿐이다. 반면 소진된 인간은 모든 가능한 것을 소진하는 자이다. 피로한 인간은 더 이상 실현할 수 없다. 그러나 소진된 인간은 더 이상 가능하게 할 수 없다.” 
-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

조부용 에디터


1. 규율사회✊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 

『피로사회』의 첫 구절입니다.

그에 따르면 지난 세기를 공포에 떨게 만든 질병은 주로 감염성 질환이었습니다. 유럽 인구의 1/3에 달하는 사상자를 초래한 페스트나, 그 밖에 천연두, 콜레라, 혹은 독감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 같은 감염성 질환이 횡행할 때 주목받는 가치는 강인한 면역 체계입니다. 면역의 근본 특징은 “부정성의 변증법”입니다. 즉 면역은 부정을 부정함으로써 자아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이해가 어렵다면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절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마주한 타인은 하나의 인격체이기에 앞서 단지 나의 건강을 헤칠 잠재력을 가진 바이러스 그 자체이자 부정 분자로 여겨집니다. 이처럼 면역학적 패러다임의 특질은 타자에 대한 ‘부정’입니다. 이때 부정은 말 그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구호이죠. 예컨대 범죄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이상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등의 사회적 요구 등이 그에 해당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를 어기는 사람들은 여지없이 범죄자, 혹은 광인으로 분류되기 마련이죠. 이러한 면역학적 패러다임으로 하지 말아야 할 부정의 내용들이 사회적 합의, 규칙, 법률 등의 형태로 완성되어 우리 행동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규율사회의 지배기구는 이를 활용하여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강화하는 데 성공합니다. 


“~해야 한다”는 강제력을 동원하여 노동자들의 성과를 촉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노동자가 스스로 동기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노동자들은 단지 규율에 복종하여, 혹은 강요에 떠밀려 수동적으로 노동에 임할 따름이죠.그러나 외부의 강제력만으로는 노동의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모름지기 등 떠밀려 일하는 사람보단 자발적으로 일하는 사람의 노동이 생산적인 법입니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생산성의 폭발을 열망하며 전에 없던 새로운 패러다임을 고안하기에 이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동기부여 주체가 되어,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의 성과를 점검하고 통제하도록 장려하는 패러다임 말이죠. 그것은 이름하여 성과사회입니다. 


2. 성과사회👌

여기 우리 앞에 열심히 공부하는 두 학생이 있습니다. 

A학생은 부모님의 강요 아래 하릴없이 책상 앞에 앉고, B학생은 스스로의 의지로 연필을 듭니다. A학생은 부모님의 시선을 피해 딴청을 피우는 등 요령을 부릴 공산이 크지만, B학생은 스스로가 감시 주체이니 남의 시선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죠. 그는 오직 자신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강요에 의한 학습이 자기주도학습을 뛰어 넘기란 쉽지 않을 테죠.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도 이와 비슷한 흐름을 거칩니다. 이 시대는 사람들에게 “~해야 한다”고 명령하기보다 “~할 수 있다”는 주문을 겁니다. 이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스스로의 성과를 관리하고 계획하는 성과주체로 변모합니다. 그리하여 이 시대는 성과주체들의 노력과 열정을 이용하여 더 없이 폭발적인 생산성을 거머쥐게 되죠. 성과사회의 특질은 긍정성에 있습니다. 


규율사회는 나와 남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선 너머의 이질적인 것들을 경계하고 금지했지만, 성과사회에서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은 신비롭고 이국적인 것으로 탈바꿈합니다. 성과사회의 긍정 예찬은 인간의 능력을 향한 무한 긍정으로 이어집니다. 성과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할 수 있다”를 되뇌이게 합니다. 이 마법의 주문에 단단히 걸려든 사람들은 ‘할 수 없음’을 도무지 상상할 수 없게 되죠. 이제 사람들은 무언가를 이루지 못했을 때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를 다그치고 좌절하게 됩니다. 분명 나는 할 수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울증이나 소진증후군 등은 이 같은 성과사회에만 고유한 병리적 현상입니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피로사회> 중에서 


이제 사람들은 스스로 성과주체가 되어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합니다. 그들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며, 오로지 긍정 밖에 모르는 성과주체로 거듭난 것입니다. 



3. 피로사회💪

‘~할 수 있다’를 외치는 성과사회에서 ‘해내지 못한’ 성과주체들은 스스로의 능력을 탓하고 비관합니다. 그리하여 다시금 될 때까지 자기 자신을 밀어붙이지만 이는 종전의 우울을 심화할 따름이죠. 그렇다면 이 상처받은 성과주체들의 영혼을 달랠 저자의 대안은 무엇일까요? 이 책은 뜻밖에도 피로를 제안합니다. 이미 탈진하여 피로한 영혼들을 향해 더욱 깊이 피로해지라는 겁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 종류의 힘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 즉 긍정적 힘이고, 또 하나는 하지 않을 힘, 즉 부정적 힘입니다. 성과주체의 특기는 긍정적 힘을 발휘하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긍정하며 끝없이 일을 벌립니다. 무한한 도전과 성취만이 그들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부정적 힘은 하지 않을 힘, 하던 것을 중단하는 힘을 가리킵니다. 만약 긍정적 힘만 있고 부정적 힘이 없다면 우린 활동과잉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우리는 하지 않을 힘을 발휘할 때 비로소 여태껏 해오던 일의 의미를 따져 묻고 사색할 수 있는 여유를 마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과주체들이 호소하는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입니다. 긍정적 힘의 피로는 탈진이자 고갈이며, 회복을 전제한 잠깐의 도피입니다. 그건 마치 직장인의 피로 같은 겁니다. 종일 할 수 있음을 외치던 낮이 저물고 퇴근 후 집에 돌아온 직장인의 피로 말입니다. 그들의 피로는 하룻밤 자고 나면 다시 넥타이를 동여매고 집을 나서야 하는 현실을 바꾸지 못합니다. 긍정적 힘의 피로는 매사를 긍정하는 현대인의 무기력한 운명 같은 것입니다. 


이 책이 우리 사회에 기대하는 피로는 이 같은 긍정적 힘의 피로가 아닙니다. 그가 바라는 피로는 해내야만 한다는 성취 강박에 대한 염증이자, 생산적이지 못하단 이유로 시대의 구석으로 밀려난 것들을 쓸모 있게 바라보는 태평입니다. 관성적으로 내딛던 걸음을 멈추고, 다른 움직임을 고민할 막간의 피로입니다. 요컨대 부정적 힘의 피로, 즉 하지 않을 힘을 발휘하는 무위의 피로는 성과논리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대면하고 영감을 충전하는 안식의 피로인 것입니다. 당장은 그저 당연하게 해오던 습관적인 일들을 조금이나마 의심해보는 정도도 괜찮습니다. 혹은 새로운 일에 무작정 뛰어들기에 앞서 잠시나마 머뭇거리는 정도도 좋습니다.

 그리하여 진정 원하는 삶을 사색하고 꿈꿀 수 있는 막간의 피로만이라도 누릴 수 있다면 성과주체의 탈진한 영혼도 조금은 숨 쉴 수 있을 테니 말이죠.



4. 소진된 인간🙂

“피로한 인간은 단지 실현을 소진했을 뿐이다. 반면 소진된 인간은 모든 가능한 것을 소진하는 자이다. 피로한 인간은 더 이상 실현할 수 없다. 그러나 소진된 인간은 더 이상 가능하게 할 수 없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의 이야기입니다. ‘피로한 인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입니다. 그는 피로와 회복을 반복하며 현재의 활동을 지속합니다. 내일은 잘 되겠지, 하는 공허한 기대를 안고 피로와 회복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면 ‘소진된 인간’은 그 어떤 가능성조차 남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에겐 내일이 없습니다. 당장 내일의 활동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크나큰 기회입니다.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이 모두 소진된 인간은 그제서야 자기만의 고유한 잠재성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피로한 인간은 아직 모든 가능성을 소진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수많은 성과주체들이 극심한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온갖 과제에 뛰어드는 것은 일말의 가능성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예컨대 그들은 바디프로필에 담을 조각 같은 몸을 만들어보겠다고 무수한 식이요법과 값비싼 P.T를 병행하고, 또 유창한 영어 실력을 꿈꾸며 이 학원 저 학원을 전전하며, 열심히 모은 종잣돈을 굴리겠다고 갖가지 주식 채널을 섭렵합니다. 그들은 그러한 활동이 자기 삶에 어떤 의미인지를 고민하기보다 그저 모든 활동들에 날카롭게 반응하고 재빠르게 갈아타는 것입니다.하지만 이 모든 활동의 끝에서 실낱 같은 가능성마저 모두 소진한 인간은 마침내 자아와 활동의 조화를 사색하게 됩니다. 가령 사진 한 장의 허영이 아닌 육신의 건강과 정신의 안녕을 소망하고, 주변에서 필수 스펙이라며 떠드는 것들을 무작정 좇기보다 자기에게 필요한 공부를 고민하며, 또 일확천금을 공상하는 대신 돈의 적절한 쓰임과 필요를 삶의 목적과 조화롭도록 계획합니다.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뒤에야 자기만의 고유한 의미를 써 내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진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문을 새로 열고 싶다면 먼저 문을 닫아야 하듯이, 충만해지려거든 기꺼이 소진되어야 합니다.


에디터의 생각👀

열심히 살아도 됩니다. 나의 에너지를 전부다 써버려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힘든건 이러다가 내가 지쳐서 나가 떨어지면 어쩌지 라는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소진하세요. 그리고, 나의 삶의 맥락을 고민하세요. 사색하세요. 그렇게 나를 찾아 가시면 됩니다.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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