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정조는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 계획된 분량의 책을 읽었으며 내로라하는 신하들을 가르칠 정도로 학문이 깊었습니다. 50발의 화살 중에 49발을 명중시킬 정도로 궁술이 뛰어난 왕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한 발은 소신 있게 일부러 허공에 쏘았습니다. 문무에 고루 능한 왕은 젊은 신하들과 격의 없이 유머를 나누는 호방한 성격에다가 지고지순하게 한 여자를 사랑까지 합니다. 정말 인간미 없이 완벽하지 않나요?
정조의 인간미는 그의 ‘리더십’에서 드러납니다. <리더라면 정조처럼>은 정조의 리더십을 49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정조는 한 번 믿음을 줬던 사람에게는 그 의를 다하며, 친인척 관료들과는 단호히 거리를 두고, 능력 있는 백성을 가까이 둔 지도자였습니다.
의빈 성씨 묘
정조는 궁녀였던 의빈 성 씨에게 동궁 시절부터 여러 번 청혼 했지만 몇 년에 걸쳐 거절당했습니다. 의빈 성 씨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정조는 그녀의 승낙을 받고서야 혼인합니다. 정조는 의빈 성 씨가 죽은 후, 일대기가 담긴 ‘묘지명’을 직접 쓰기도 했습니다. 조선 역사상 국왕의 승은을 거절한 여인도 유일하거니와 여인의 묘지명을 쓴 국왕도 유일할 것입니다.
정조 세손 시절부터 측근이었던 홍국영은 정조를 크게 배반했습니다. 정조의 정적들을 제거하던 홍국영이 요직에 오른 뒤 권력에 집착을 보이고, 왕비를 독살하려다 발각되기까지 하죠. 정조는 한 번 한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국왕 등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동덕회 일원들을 끝까지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홍국영에게 은퇴 후 하사하는 직책을 주며 정치를 멀리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홍국영이 여전히 조정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자 유배를 보냅니다. 정조는 홍국영을 비롯해 권력을 농단하는 관료들을 과감하게 내쳤습니다. 정조는 가까운 인물들에게 변치 않는 신의와 진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가깝다고 잘못을 덮어두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정조의 업적을 화성 축조, 토지 개혁, 탕평책 등의 딱딱한 단어로 배웠습니다. 그 밑바탕에는 인간적인 정책이 있었습니다.
수원 화성에서 정조가 민주주의 제도의 기반을 마련했던 것을 아시나요? 수원 화성의 북쪽 들녘인 ‘대유둔’에 마련된 운영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곳의 최고 책임자는 화성유수가 임명했으나 실제 대유둔을 운영하는 주체인 ‘마름’은 농사 짓는 백성들이 의견을 모아 가장 현명한 사람을 뽑게 했습니다. 임금 체계도 혁신적이었습니다. 양반인 둔도감과 도감에겐 매달 쌀 1가마를 지급하게 했지만, 마름에게는 매달 쌀 2가마를 지급했습니다.
정조가 8세에 세손으로 책봉되기 이전 원손시절 큰 외숙모에게 쓴 한글 편지
또한 백성들 모두가 난전을 차려 자유로운 상업 행위를 할 수 있게 했습니다. 정조 이전까지 조선에서는 시전상인들에게만 특별 권한을 주었습니다. 금난전권. 난전을 금하는 권리죠. 정조는 조선 건국 이래 399년간 이어져온 기존의 정책을 과감하게 바꾼 것입니다. 도망간 노비를 잡아들이는 인간사냥꾼 ‘노비추쇄관’ 제도를 혁파해 노비제도 자체를 없애고자 했습니다. 군비 축소를 통해 민간 경제를 활성화하고자 했으며 규장각을 두어 젊은 인재를 육성했습니다.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솔선수범해 왕실 재정을 대규모 감축했습니다. 내시와 궁녀를 절반 가까이 줄이고, 국방비를 절약하기 위해 군대를 통폐합을 시켰습니다. 사적인 부분에서도 검소함을 보였는데요. 원래 왕은 11가지 이상의 반찬이 준비되는데 정조는 하루에 두 끼만 먹고 한 끼당 반찬을 다섯가지만 먹었습니다. 고급 비단옷 대신 무명옷을 입었습니다. 재위 기간 24년 동안 변함없이 지켰습니다.
정조는 국왕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4가지 개혁 방안을 ‘경장대고’로 이야기했습니다. ‘경장’은 개혁을 말하며, ‘대고’는 백성들에게 크게 고한다는 뜻입니다. 정조는 기득권의 특권을 분산시키는 위로부터의 개혁과 백성이 주체인 삶을 만들어 조선을 변화시키고자 했습니다.
당파별로 나눠주던 관직을 당파를 배제하고 필요한 인재들로 채웠으며 사적인 감정을 배격하고, 때로는 정계에서 배제되어 유배를 갈 것으로 생각했던 노론 세력을 개혁정치에 참여시키는 탕평 정책을 펼쳤습니다.
정조는 사적인 생활과 가치관에 대해서는 완벽주의자로 느껴질 정도로 엄격했지만 실행한 정책들의 밑바탕을 살펴보면 언제나 백성을 향한 인간미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1700년대 리더 정조가 지금까지 인기를 이어온 비결이 아닐까요.
리더라면 정조처럼 | 김준혁
정조 리더십의 비밀은 인간미?
수원 화령전에 있는 정조 어진
정조는 이 문장을 자신의 침실 벽에 써놓고 늘 가슴에 새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조는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 계획된 분량의 책을 읽었으며 내로라하는 신하들을 가르칠 정도로 학문이 깊었습니다. 50발의 화살 중에 49발을 명중시킬 정도로 궁술이 뛰어난 왕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한 발은 소신 있게 일부러 허공에 쏘았습니다. 문무에 고루 능한 왕은 젊은 신하들과 격의 없이 유머를 나누는 호방한 성격에다가 지고지순하게 한 여자를 사랑까지 합니다. 정말 인간미 없이 완벽하지 않나요?
정조의 인간미는 그의 ‘리더십’에서 드러납니다. <리더라면 정조처럼>은 정조의 리더십을 49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정조는 한 번 믿음을 줬던 사람에게는 그 의를 다하며, 친인척 관료들과는 단호히 거리를 두고, 능력 있는 백성을 가까이 둔 지도자였습니다.
의빈 성씨 묘
정조는 궁녀였던 의빈 성 씨에게 동궁 시절부터 여러 번 청혼 했지만 몇 년에 걸쳐 거절당했습니다. 의빈 성 씨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정조는 그녀의 승낙을 받고서야 혼인합니다. 정조는 의빈 성 씨가 죽은 후, 일대기가 담긴 ‘묘지명’을 직접 쓰기도 했습니다. 조선 역사상 국왕의 승은을 거절한 여인도 유일하거니와 여인의 묘지명을 쓴 국왕도 유일할 것입니다.
정조 세손 시절부터 측근이었던 홍국영은 정조를 크게 배반했습니다. 정조의 정적들을 제거하던 홍국영이 요직에 오른 뒤 권력에 집착을 보이고, 왕비를 독살하려다 발각되기까지 하죠. 정조는 한 번 한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국왕 등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동덕회 일원들을 끝까지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홍국영에게 은퇴 후 하사하는 직책을 주며 정치를 멀리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홍국영이 여전히 조정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자 유배를 보냅니다. 정조는 홍국영을 비롯해 권력을 농단하는 관료들을 과감하게 내쳤습니다. 정조는 가까운 인물들에게 변치 않는 신의와 진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가깝다고 잘못을 덮어두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정조의 업적을 화성 축조, 토지 개혁, 탕평책 등의 딱딱한 단어로 배웠습니다. 그 밑바탕에는 인간적인 정책이 있었습니다.
수원 화성에서 정조가 민주주의 제도의 기반을 마련했던 것을 아시나요? 수원 화성의 북쪽 들녘인 ‘대유둔’에 마련된 운영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곳의 최고 책임자는 화성유수가 임명했으나 실제 대유둔을 운영하는 주체인 ‘마름’은 농사 짓는 백성들이 의견을 모아 가장 현명한 사람을 뽑게 했습니다. 임금 체계도 혁신적이었습니다. 양반인 둔도감과 도감에겐 매달 쌀 1가마를 지급하게 했지만, 마름에게는 매달 쌀 2가마를 지급했습니다.
정조가 8세에 세손으로 책봉되기 이전 원손시절 큰 외숙모에게 쓴 한글 편지
또한 백성들 모두가 난전을 차려 자유로운 상업 행위를 할 수 있게 했습니다. 정조 이전까지 조선에서는 시전상인들에게만 특별 권한을 주었습니다. 금난전권. 난전을 금하는 권리죠. 정조는 조선 건국 이래 399년간 이어져온 기존의 정책을 과감하게 바꾼 것입니다. 도망간 노비를 잡아들이는 인간사냥꾼 ‘노비추쇄관’ 제도를 혁파해 노비제도 자체를 없애고자 했습니다. 군비 축소를 통해 민간 경제를 활성화하고자 했으며 규장각을 두어 젊은 인재를 육성했습니다.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솔선수범해 왕실 재정을 대규모 감축했습니다. 내시와 궁녀를 절반 가까이 줄이고, 국방비를 절약하기 위해 군대를 통폐합을 시켰습니다. 사적인 부분에서도 검소함을 보였는데요. 원래 왕은 11가지 이상의 반찬이 준비되는데 정조는 하루에 두 끼만 먹고 한 끼당 반찬을 다섯가지만 먹었습니다. 고급 비단옷 대신 무명옷을 입었습니다. 재위 기간 24년 동안 변함없이 지켰습니다.
정조는 국왕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4가지 개혁 방안을 ‘경장대고’로 이야기했습니다. ‘경장’은 개혁을 말하며, ‘대고’는 백성들에게 크게 고한다는 뜻입니다. 정조는 기득권의 특권을 분산시키는 위로부터의 개혁과 백성이 주체인 삶을 만들어 조선을 변화시키고자 했습니다.
당파별로 나눠주던 관직을 당파를 배제하고 필요한 인재들로 채웠으며 사적인 감정을 배격하고, 때로는 정계에서 배제되어 유배를 갈 것으로 생각했던 노론 세력을 개혁정치에 참여시키는 탕평 정책을 펼쳤습니다.
정조는 사적인 생활과 가치관에 대해서는 완벽주의자로 느껴질 정도로 엄격했지만 실행한 정책들의 밑바탕을 살펴보면 언제나 백성을 향한 인간미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1700년대 리더 정조가 지금까지 인기를 이어온 비결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