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사를 다닐 때, 5년차가 되었을 때였습니다. 이제 막 대리를 달아서, 자신감이 하늘을 치솟을 때였죠. 그 때, 입사한 지 딱 1년 정도 된 후배가 와서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선배, 저 요즘에 슬럼프에 빠진 것 같아요."
라면서 자신의 상황을 툭 털어놓더군요. 긴 이야기의 끝에 물었습니다.
"지금 슬럼프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상냥하게 대답했습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곧 그 슬럼프에서 벗어날 거야. 왜냐하면, 너의 상황은 더 안 좋아질 게 분명하거든. 지금금은 슬럼프가 아니라 너의 전성기야."
농담처럼 이야기해서 화목하게 웃었지만, 진심이었습니다. 제가 당시에 다니던 회사는 1년 만에 적응했다, 이제는 좀 쉬워졌다라는 기분을 느낄 수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힘든 시간을 겨우 넘기고 적응했다라는 생각이 들면, 다시금 더 어려운 일들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니, 궁금했습니다. 어딘가에 적응하지 못하고, 슬럼프에 빠지는 기분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만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한 분야의 최고가 된 사람들도 슬럼프를 겪을까? 그들도 슬럼프를 겪으면 어떻게 극복하지? 라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슬럼프를 사는 사람
이 질문에 대한 수많은 답 중에 하나를, 김지수 작가님의 『의젓한 사람들』의 작곡가 진은숙님의 인터뷰에서 발견했습니다. 작곡가 진은숙은 독일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현대음악 작곡가입니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 3대 음악상 중 하나인 그라베마이어상을 수상했고,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주 작곡가로 활동하며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이름이 낯설 수 있지만, 유럽 클래식계에서는 '음향의 혁신가'로 불릴 만큼 독보적인 작곡 세계를 구축해왔습니다.
그녀는 김지수 작가의 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Q. 슬럼프는 언제였나요?
A. 인생 전체가 슬럼프였다고 보는 게 맞아요.
Q. 이상하게 위로가 되는 말이네요.
A. 인생이 그냥 슬럼프의 연속이에요. 슬럼프를 사는 거죠. 슬럼프가 일시적이라고 생각한다면,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쓰겠죠. 하지만, 우리 삶 자체가 슬럼프라고 생각한다면,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 안에서 내가 잘 살 수 있는 것을 고민합니다.
그녀는 '장 보러 나가는 것 말고는 외출할 일이 거의 없고, 사람을 만나는 데 에너지를 쓰지도 않는다'고 말합니다. 대신 작곡에 몰두하다 보면 시간은 어느새 흘러가 있다고요. 슬럼프 속에서도 그냥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녀의 인터뷰를 보면, 슬럼프에 빠졌을 때 중요한 것은 극복하거나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슬럼프임에도 불구하고 삶의 리듬을 지켜나가는 것.' 애써 극복할 대상이 아니라, 리듬을 잃지 않고 살다가 지나가는 것이죠.
슬럼프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슬럼프를 만드는 것은 지금의 내 상황이 아니라, 지금의 내 상황을 '슬럼프'라고 규정하는 인식일 수도 있습니다.
일반의미론의 창시자 알프레드 코르집스키는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The map is not the territory)'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것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라는 뜻입니다. 슬럼프도 마찬가지입니다. '슬럼프'라는 단어는 지도에 불과합니다. 내 앞에 펼쳐진 실제 영토, 즉 매일의 일상은 어제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슬럼프'라는 지도를 펼치는 순간, 같은 풍경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같은 오르막길이라도, 등산 지도에 '난코스'라고 적혀 있으면 다리가 먼저 무거워집니다. 하지만 그냥 '산길'이라고만 적혀 있으면, 같은 경사를 묵묵히 올라갑니다. 실제로 심리학 연구에서도, 어떤 과제를 '테스트'라고 부르면 수행 능력이 떨어지고, 같은 과제를 '연습'이라고 부르면 더 좋은 결과를 보인다는 결과가 반복적으로 확인됩니다. 이름이 경험을 바꾸는 것입니다.
진은숙이 슬럼프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슬럼프라는 지도를 접어두었기 때문입니다. 인생 전체가 슬럼프라고 말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슬럼프라는 이름을 무력화시키는 일입니다. 모든 것이 슬럼프이면, 아무것도 슬럼프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남는 것은 지도가 아니라 영토, 즉 오늘 해야 할 일과 오늘의 리듬뿐입니다.
상황이 나를 슬럼프에 빠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상황에 '슬럼프'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슬럼프가 시작됩니다. 이름을 바꾸면, 풍경이 바뀝니다.
회사를 다닐 때, 5년차가 되었을 때였습니다. 이제 막 대리를 달아서, 자신감이 하늘을 치솟을 때였죠. 그 때, 입사한 지 딱 1년 정도 된 후배가 와서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선배, 저 요즘에 슬럼프에 빠진 것 같아요."
라면서 자신의 상황을 툭 털어놓더군요. 긴 이야기의 끝에 물었습니다.
"지금 슬럼프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상냥하게 대답했습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곧 그 슬럼프에서 벗어날 거야. 왜냐하면, 너의 상황은 더 안 좋아질 게 분명하거든. 지금금은 슬럼프가 아니라 너의 전성기야."
농담처럼 이야기해서 화목하게 웃었지만, 진심이었습니다. 제가 당시에 다니던 회사는 1년 만에 적응했다, 이제는 좀 쉬워졌다라는 기분을 느낄 수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힘든 시간을 겨우 넘기고 적응했다라는 생각이 들면, 다시금 더 어려운 일들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니, 궁금했습니다. 어딘가에 적응하지 못하고, 슬럼프에 빠지는 기분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만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한 분야의 최고가 된 사람들도 슬럼프를 겪을까? 그들도 슬럼프를 겪으면 어떻게 극복하지? 라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슬럼프를 사는 사람
이 질문에 대한 수많은 답 중에 하나를, 김지수 작가님의 『의젓한 사람들』의 작곡가 진은숙님의 인터뷰에서 발견했습니다. 작곡가 진은숙은 독일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현대음악 작곡가입니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 3대 음악상 중 하나인 그라베마이어상을 수상했고,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주 작곡가로 활동하며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이름이 낯설 수 있지만, 유럽 클래식계에서는 '음향의 혁신가'로 불릴 만큼 독보적인 작곡 세계를 구축해왔습니다.
그녀는 김지수 작가의 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Q. 슬럼프는 언제였나요?
A. 인생 전체가 슬럼프였다고 보는 게 맞아요.
Q. 이상하게 위로가 되는 말이네요.
A. 인생이 그냥 슬럼프의 연속이에요. 슬럼프를 사는 거죠. 슬럼프가 일시적이라고 생각한다면,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쓰겠죠. 하지만, 우리 삶 자체가 슬럼프라고 생각한다면,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 안에서 내가 잘 살 수 있는 것을 고민합니다.
그녀는 '장 보러 나가는 것 말고는 외출할 일이 거의 없고, 사람을 만나는 데 에너지를 쓰지도 않는다'고 말합니다. 대신 작곡에 몰두하다 보면 시간은 어느새 흘러가 있다고요. 슬럼프 속에서도 그냥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녀의 인터뷰를 보면, 슬럼프에 빠졌을 때 중요한 것은 극복하거나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슬럼프임에도 불구하고 삶의 리듬을 지켜나가는 것.' 애써 극복할 대상이 아니라, 리듬을 잃지 않고 살다가 지나가는 것이죠.
슬럼프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슬럼프를 만드는 것은 지금의 내 상황이 아니라, 지금의 내 상황을 '슬럼프'라고 규정하는 인식일 수도 있습니다.
일반의미론의 창시자 알프레드 코르집스키는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The map is not the territory)'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것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라는 뜻입니다. 슬럼프도 마찬가지입니다. '슬럼프'라는 단어는 지도에 불과합니다. 내 앞에 펼쳐진 실제 영토, 즉 매일의 일상은 어제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슬럼프'라는 지도를 펼치는 순간, 같은 풍경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같은 오르막길이라도, 등산 지도에 '난코스'라고 적혀 있으면 다리가 먼저 무거워집니다. 하지만 그냥 '산길'이라고만 적혀 있으면, 같은 경사를 묵묵히 올라갑니다. 실제로 심리학 연구에서도, 어떤 과제를 '테스트'라고 부르면 수행 능력이 떨어지고, 같은 과제를 '연습'이라고 부르면 더 좋은 결과를 보인다는 결과가 반복적으로 확인됩니다. 이름이 경험을 바꾸는 것입니다.
진은숙이 슬럼프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슬럼프라는 지도를 접어두었기 때문입니다. 인생 전체가 슬럼프라고 말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슬럼프라는 이름을 무력화시키는 일입니다. 모든 것이 슬럼프이면, 아무것도 슬럼프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남는 것은 지도가 아니라 영토, 즉 오늘 해야 할 일과 오늘의 리듬뿐입니다.
상황이 나를 슬럼프에 빠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상황에 '슬럼프'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슬럼프가 시작됩니다. 이름을 바꾸면, 풍경이 바뀝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