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당신은 동물 쪽인가, 식물 쪽인가

이병률 작가가 쓴 글과 인사이트입니다.💫


사람을 덜 믿기로 한다. 너무 많이 믿었으므로 그 총량을 다 쓴 것만 같다.  사람이 정말로 징그럽고도 징그러운 존재인 이유는, 사람은 결국 누구나 변하고 만다는 혐의 때문일 것인데.

 제주 작업실로 누군가 찾아왔다. 글을 쓰고 있고 책을 내고 싶다고 했다.  출판 일이란, 인생에 단 한 권쯤 가슴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 책으로 묶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가진 사람을 반가워하는 일.  그 일을 덩어리로 구워내고 제본하는 일. 

 

우리는 한 권의 책이 되기 위한 문장과 길이와 그 속의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나눴다. 재미있는 세계를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그는 배우였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우연히 그를 만날 일이 있었다. 나로선 그의 원고를 기다리는 입장이었으니 그 우연도 퍽 반가웠다. 글의 안부를 물었다. 대뜸 무슨 소리냐고 했다. 책을 내고 싶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고 되물으니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제주로 나를 찾아온 사실만 기억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약이 올랐다. 약이 오르는 정도가 아니라 약이 타들어갔다.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은 정도로 괜찮았으면 좋겠는데 그게 그렇게 지나가지지 않았다. 나는 이럴 때일수록 동물이 된다.  

 

당신도 그렇지 않겠는가. 복잡한 기분이 며칠 동안 풀리지 않았다.  

어느 술자리에서 친구와 술 한 잔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참, 내가 지금 마주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이 정신과 전문의였지’ 싶어 술김에 그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한 사람이 있는데, 배우인데, 책을 내겠다고 찾아와서는 깊고 진중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지 않았냐고 원고의 안부를 물었는데, 그런 적이 없다더라. 사람이 선택적으로 기억을 지울 수도 있다지만 일 년 사이에 그럴 수도 있단 말인가.  

 

배우라는 사실이 실감나게 그가 나를 대하는 방식은 대담했었다. 그의 웃음 밑에, 살 밑에 깔린 서늘한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면 내가 하는 말이 거짓말이 되는 거였다. 거짓말 탐지기에도 표정이 있다면 나의 이 표정과 같을까.   

 

이 정도까지만 속 얘기를 꺼내놓고 있는데 앞에 있던 친구가 그랬다. 그 사람은 180도, 뒤집는다.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니, 그 사람이 돌아올 거라 했다. 다시 와서는 책을 내겠다고 할 거라고 바늘이 쇠를 뚫어내듯 말했다. 나는 다시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원래 그래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벌이고 싶은데, 스스로 그걸 붙들어서 말리는 거죠. 없던 것처럼 지워 없애죠.  근데 그게 스멀스멀 다시 고개를 듭니다. 분명히 다시 이 시인을 찾아올 겁니다. 그건 왜 그러냐 하면 잘 뒤집는 사람은 다시 원래로 뒤집게 마련이에요. 그런 사람은 묘하게도 자신을 반복해서 뒤집는 성질을 가졌어요. 제 말을 믿게 될 겁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사람은 참, 별게 아닐 수도 있는데 이 나이 먹도록 사람이 별거라고 믿는 내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한 것이다. 사람의 처음 그대로를 믿으려 하고, 사람을 식물 대하듯 아름답게 대하려는 내 방식도 참 늘 문제다.

 

하긴 나는 와인을 따서 바로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 한 시간 정도 공기가 통하게 놔두고 마신다. 최소 이삼 년 동안 어떤 것은 오륙 년 이상을 병안에 갇혀서 한 번도 세상 공기를 맡아본 적이 없는 와인인데, 따서 바로 마신다면 그 맛이 원래의 맛일 수가 없을 거라는 가정 때문이다. 

 

한 시간 동안 그 사실을 이해받기 위해 와인도 사람도 시간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와인을 사람과 비교하고 있는 나도 한심할 뿐이지만 당장 나 아닌 어떤 사람을 무조건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쯤은 이제 아는 것이다.  

 그 사람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결국 그 사람은 다시 나에게 나타났다. 꽤 두툼한 원고를 들고 말이다. 기절을 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한 인간의 고차방정식을 풀기 위해서는 내가 얼마나 동물인지를 알아야 하겠으므로 나는 원고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 사람은 당장 퇴장시키자면서 부러 화분들 쪽으로 눈을 돌려 식물들이나 바라보았다.

 

그때 나는 단지 이 문제에만 집중했다.  나도 뒤집을 줄 아는 사람이면 어떨까. 나도 어떤 누구만큼이나 뒤집을 줄 아는 초능력을 가졌다면 어떨까.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니 이제 헤어지자,라고 했던 말을 다시금 뒤집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내가 사랑했던 몇몇 사람들이 번복자가 되어 나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을 되돌린다면 어떨까 싶은 것이다.  

 

단지 답을 알아서 그땐 뒤집었던 것뿐. 이제는 마음으로 살고 싶다며 나를 찾아오는 일. 그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있는 힘껏 몸을 되돌려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두 팔을 벌려 내 어깨에 손을 올려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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