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명이 죽어간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공통점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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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명이 죽어간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공통점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

연일 미래를 걱정하는 뉴스가 이어지는 요즘입니다. 경제문제나 사회문제 등 다양하죠. 그런데 그것보다 더 염려스러운 건 뭇사람이 더 나은 미래를 그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일 겁니다. 이게 진짜 큰일이죠. 그 절망감은 최저치의 출산율, OECD 꼴찌 수준인 행복지수, OECD 최고 수준인 자살률에서 드러났고요.


뭐가 문제일까요? 이 책의 저자이자 빈 의과 대학의 신경 정신과 교수였던 빅터 프랭클이라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 로고테라피(logotherapy)가 필요하다’고요.

 

이 책의 저자이자 빈 의과 대학의 신경 정신과 교수였던 빅터 프랭클

 


로고테라피란 ‘의미치료’입니다. 그리스어로 ‘의미’를 뜻하는 로고스logos와 치료를 뜻하는 테라피therapy를 합쳐 저자가 만든 단어이자 치료법, 이론이죠. 로고테라피 이론에서는 ‘의미를 향한 의지’를 인간의 본능적 욕구로 보며 이 의지가 좌절되었을 때 다양한 문제가 생겨난다고 보았습니다.

 

원인이 의미를 향한 의지의 좌절이므로 해결책은 ‘의미의 발견’입니다. 해결의 과정에서 저자는 개개인의 인간이 지닌 자유, 책임을 강조합니다.


그 이론이 탄생한 건 다름 아닌 이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개인적인 체험기죠. 나치가 세운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던 저자의 ‘체험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는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통해 인간이란 험난한 상황에서도 자기 삶에 책임지며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잠재력과 자유를 지닌 존재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절망에 빠진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이 책을 집필했다고 말합니다.

 


처참했던 수용소 생활과 스스로 무너진 사람


저자가 들어간 수용소는 처참했습니다. 수감자들은 축사 같은 곳에 욱여넣어지고 짐도 모두 뺏겼죠. 나치는 과반수의 사람에겐 비누를 쥐어주고 목욕탕으로 그들을 데려갔습니다. 더러워진 몸을 씻어낼 물을 기대했건만 샤워호스에서는 가스가 나왔죠. 나치가 쓸모없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수용소에 오자마자 그렇게 죽고 화장당했던 겁니다. 


남은 사람들은 채찍을 맞으며 옷도 모두 벗겨지고 털도 밀립니다. 그들은 ‘이 끔찍한 상황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구나’, ‘잘못하다간 그냥 죽겠다’란 자각과 함께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는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죽지 않을 정도의 식량만을 받으며 노동력을 착취당합니다.


수감자들은 점차 무감각해집니다. 동상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갗, 끝이 없는 노동, 구타, 배고픔에 상접해진 피골, 매일같이 쌓여가는 시체가 일상이 되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게 되죠. 보호반응입니다. 괴로운 현실이 가져다주는 자극, 그 자극이 촉발하는 부정적 정서, 끝이 없어 보이는 악순환에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나치에 의해 수용소에 수감되어있는 모습

 

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동태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시체 앞에서도 뜨거운 수프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고요. 정서적으로 무감각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미래라고는 기대하기 힘든 가혹한 상황입니다. 스스로 무너지는 사람이 생겨납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를 잃고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자신을 포기해 버리죠. 자살을 하거나 이런 식으로 모든 걸 거부하는 겁니다.

 

대체로 이런 현상은 아침에 수감자가 옷 입고 세수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아니면 연병장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간청과 주먹질, 위협도 효과가 없다. 그냥 누워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 그냥 포기하는 것이다. 자기가 싼 배설물 위에 그냥 그렇게 누워 있으려고만 한다. 세상 어떤 것으로부터도 더 이상 간섭받지 않고.

120p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견딜 수 있었다


자유라곤 찾아볼 수 없던 그 안에서도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찾아 버텨내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거나 사소한 곳에서 행복을 찾아보는 겁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불그스름한 하늘을 보며 감동에 젖기도 하고 즉석 카바레를 구성해 노래를 부르거나 시를 낭송하기도 합니다. 수프에 콩알 몇 개가 더 들어갔다고 좋아하기도 하고요. 이루지 못한 목표와 관련해 지금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외적 자유가 제한된 상황에서도 자신을 책임지고 돌볼 줄 알았고, 인간성을 잃지 않는 선택을 하고자 노력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왜 사는지 알았기에 수용소 생활을 견딜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중에는 남을 위해 희생까지 한 위대한 성인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희생되었을지언정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자 하는 선택을 했고 타인의 삶을 책임지고자 했습니다. 처참한 외적 상황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내적 자유에 의한 선택마저 막을 순 없었죠.

 

출처 -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中

 

이들은 카포와는 달랐습니다. 카포는 수감자를 감시하는 수감자입니다. 저자는 카포가 나치 대원보다 악랄하고 냉혹한 경우가 많았다고 말합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누구는 성자처럼 행동하며 의미 있게 살고자 할 때 누구는 돼지처럼 행동했던 이유는 뭘까요?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내면에는 성자처럼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돼지처럼 무의미하게 살 수 있는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어느 길을 가느냐 하는 문제는 본인의 자유, 책임, 의지에 달렸다고요.

 


그래서 삶의 의미란 무엇이냐 하면


이제 이 질문을 던져볼 때가 됐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삶의 의미라는 게 뭘까요? 저자는 삶의 의미에 관한 추상적 질문을 던져선 안 되며 그것은 시간, 상황, 사람에 따라 다른 도전으로, 질문으로, 문제로 주어지는 무언가에 책임을 짊으로써 실현된다고 말할 뿐,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진 않습니다.

 

다만, 유추해 봤을 때 우리는 저자가 말하는 삶의 의미란 게 ‘적절한 어떤 목표이자 가치, 자신 만의 이야기’와 연관되어 있다고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삶에 적절히 추구할 만한 목표가 있다면, 자기 삶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기 상황을 적절히 해석하고 올바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면,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나치 전범 아이히만이 재판받는 모습. 그는 홀로코스트에 가장 크게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시킨 일만 열심히 했을 뿐'이라며 자신의 범죄를 부정했다.

 

삶의 의미는 어떻게 찾을까요? 저자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무언가를 성취함으로써’, ‘어떤 경험을 통해서’, ‘어떤 태도를 견지함으로써’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이런 질문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뭘까? 선, 진리, 아름다움, 사랑 등 내가 경험하고 싶은 건 뭘까? 제한된 상황에서도 내가 취할 수 있는 적절한 태도는 뭘까? 물론, 그 성취와 경험, 태도는 누구라도 가치 있다고 판단할 만한 것이어야 합니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삶의 의미는 그 자체를 목표로 삼거나 그 자체로 실현시킬 수 있는 대상은 아니라는 겁니다. 삶의 의미는 삶이 내게 부여한 질문에 올바른 행동, 태도로 대답하고 그에 책임을 짊으로써 부수적으로 실현되는 결과일 뿐입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 떠오르는 의문 등에 적절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판단, 행동 등 대응함으로써 생겨나는 부산물이라는 말이죠.


저자는 오히려 삶의 의미를 그 자체로 좇고자 하면 그것으로부터 멀어진다고 경고합니다.

 


로고테라피가 필요한 우리


서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로고테라피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저자의 관점에서 봤을 때 우리가 겪는 다양한 문제는 ‘각 개인이 삶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좌절되었기에 발생하는 것들입니다.

 

더 나은 미래를 그리지 못하는 모습이 그렇죠. 게다가 돈, 권력, 쾌락을 향한 지나친 집착, 공격성, 마약과 술 중독, 우울증도 개인들이 충만한 의미를 찾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들입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위기에 맞서 이제는 정말 물어야 할 때가 온듯합니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요. 우리는 그동안 뛰어난 스펙, 높은 점수, 좋은 대학과 직장, 많은 돈이라는 답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배우며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거나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이게 진짜 우리가 원하는 걸까요. 그래야만 가치 있는,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걸까요.


애초에 그 답에 따라 살 수 있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나머지는 그 답을 노력이 부족해 가지지 못한다고 자책하다, 그렇게 미래에 대한 기대를, 삶에 대한 의미를 잃게 됩니다. 설령 열심히 따라간들 내면의 공허함을 이겨내지 못해 우울증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1945년 처음 책을 쓸 때 (...) 내가 원했던 것은 독자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 예를 통해 전달하는 것뿐이었다.

9p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우리 삶에는 잠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 잠재적 의미를 실현하기 위해 살지, 아니면 무의미한 느낌에 몸서리치며 살지, 그건 순전히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